매일신문

[문학기행] 김훈의 '칼의 노래'⑬

전쟁 마지막 결정 앞둔 통제사의 고뇌

왜 오늘을 사는가? 온갖 먼지와 무의미로 점철된 오늘을 왜 버리지 않는가? 나는 그 대답을 항상 통제사에게서 찾는다. 통제사는 나에게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 어렵게 찾은 희망조차도 무의미하게 변질시키는 세상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아가는 길을 가르친다. 내 무의미한 현재를 규정하는 수많은 껍데기들을 쓸어담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너머로 던져버려야 하는 이유와 의미를 가르친다. 다른 시대를 살지만 그 실체는 조금도 다르지 않은 세상이 쓸쓸했다.

도와다오. 부디 내가 하는 결정과 판단이 옳은 것이 되도록. 너희들의 값진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지난 7년, 이 나라 조선 백성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도록. 내가 가야 할 길을 일러다오.(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대본 부분)

관음포로 넘어가는 고개가 가파르다. 관음포를 찾아가는 내 마음의 흐름도 그만큼 가파르다. 통제사에 비해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크기의 영혼과 삶의 형상을 지닌 나에게도 어떤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런 시간은 존재한다. 나는 그때마다 7년 전쟁의 마지막 결정을 앞둔 통제사의 고뇌를 생각했다. 부하들의 값진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슬픈 백성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도록 지금 죽음과 피를 선택해야만 했던 통제사의 역설을 생각했다.

'이충무공전몰유허'라는 비석 앞에 도착했다. 다소 초라하다. 주변 풍경과는 조금 이질적인 기다란 바위에 유명한 '戰方急 愼勿言我死(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삼가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는 통제사의 마지막 말이 적혀 있었다. 통제사의 비장함이 쓸쓸했다. 휭~하니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먼지를 날렸다. 이락사(李落詞)가 보였다. 이락사는 통제사가 죽은 후 시신을 처음으로 모신 장소이다.

-보이는가? 피비린내를 맡기 위해 모여드는 원혼들의 모습이… 내 눈에는 보인다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원혼이 양날의 검처럼 나를 할퀴고 지나가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장군의 승리이며 이 땅의 승리입니다. 조선의 바다가 다시 어부들의 풍어가로 가득하게 될 그 날을, 그들은 바라고 또 원할 것입니다.

-그럴 테지…그들의 피로 물들였던 바다였으니…또한 나의 피도 원할 것일세.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대본 부분)

자신들의 피로 물들였던 바다 위에 양날의 칼처럼 할퀴고 지나가는 원혼들의 모습이 이락사와 겹쳐졌다. 자신의 피도 원할 것이라던 통제사의 언어가 쓸쓸했다. 영원히 죽지 않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통제사의 마음이 다시 쓸쓸했다. 그 쓸쓸함 너머로 아직까지도 어부들의 풍어가가 제대로 울리지 못하는 한반도의 슬픔을 생각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그 생각으로 선택하는 삶의 길도 반드시 하나만은 아니다. 통제사에게나 통제사를 두려워하는 세력에게나 현재의 삶이 던지는 절실함은 같았으리라. 7년의 전쟁이 끝난 후,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고 수많은 민초들의 신뢰와 강력한 군대를 지닌 영웅이 가장 먼저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임금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임금에게 그 영웅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임금에게는 통제사의 마음보다는 통제사의 존재하지 않는 칼날이 먼저 보였을 게다. 임금은 통제사의 마음과 항상 함께하는 민심이 더욱 두려웠을 게다. 앞으로 달려가려는 발걸음과 그 자리에 머물러 떠날 줄 모르는 마음이 칼날이 되어 부딪치고 있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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