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얘기는 하시면 안 돼요, '아빠'라는 단어만 나와도 아빠한테 가자고 조르거든요."
다섯살 소윤이(가명), 생후 19개월의 지윤이(가명)와 함께 사는 스물일곱살의 주부 고영미(가명)씨. 달서구 송현동의 국민임대아파트 12층 고씨의 집은 33㎡ 남짓. 세 모녀가 살기엔 넓지도 좁지도 않다. 고씨가 두 딸을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은 3개월 전. 복지관과 구청 덕분이었다. 하지만 고씨에게는 이마저도 힘겨워보였다. 방 한쪽에는 각종 고지서들이 붙어있었다. 아파트 관리비가 3개월째 밀려있었고, 도시가스 사용료도 마찬가지였다. 전자레인지에는 '지난달 우유대금 잘 받았습니다. 이번 달도 꼭 부탁드립니다'라는 내용의 쪽지가 붙어있었다. 아이들 우유값만큼은 연체가 덜된 것 같았다. 그 사이로 때가 한참 지난 복권도 눈에 띄었다.
"빚을 갚으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허리디스크 때문에 쉽지 않네요. 복권에 당첨되면 한번에 갚을 수 있으니까…." 고씨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곧 지윤이의 다리에 약을 발랐다. 자신 때문에 화상을 입었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고씨는 미혼모였다. 5년 전 일식집에서 일하다 만난 남편이 가정 있는 남자인 줄 몰랐었기 때문이다. 소윤이가 10개월 되던 2004년 겨울, 고씨는 간통 혐의로 소윤이와 함께 구치소에서 20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남편을 믿었다. 전처와 이혼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부부는 함께 작은 식당을 열어 밥벌이에 나섰다. 고씨는 둘째 지윤이를 가진 몸으로 식당일에 전념했다. 허리디스크도 이때 찾아왔다. 지윤이를 낳고도 고된 밥벌이는 계속됐다. 하지만 남편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온라인 게임에 열중했고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고씨는 주방에 유모차를 놔두고 아이들을 챙기며 식당일을 해야했다. 그러다 일이 벌어졌다. 뜨거운 냄비 국물이 유모차에 있던 지윤이의 왼쪽 엉덩이와 다리에 떨어진 것. 자지러지는 지윤이를 병원에 데려가면서 고씨는 피울음을 삼켰다. 결국 고씨는 지난해 7월 남편과 헤어졌다.
고씨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지금의 빚문제는 남편과 헤어진 뒤에야 터졌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지인이 자신의 명의로 500만원을 쓰고 잠적했다. 게다가 남편이 몰래 끌어다 쓴 돈이 1천만원이나 된다는 걸 지난 2월에야 알게 됐다. 정부에서 지원받는 30만원은 고스란히 빚 갚는 데 쓰인다. 벌이라고는 1주일에 두어번 나가는 전단지 붙이기 아르바이트가 고작. 한달에 30만원 남짓한 돈으로는 아이들의 우유값과 지윤이의 기저귀값에도 모자란다고 했다.
"아이들이 또래보다 몸무게가 적게 나가요. 피부가 유난히 하얀 것도 잘 먹이지 못해 생긴 빈혈 때문이라더군요."
지윤이의 다리에 약을 문지르던 고씨는 두달에 한번씩 약을 써야 한다고 했다. 한번에 들어가는 약값은 70만원. 화상으로 생긴 상처에 바르는 약은 보험적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의 다리에 약을 바르던 고씨는 허리를 펴다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와중에도 지윤이는 고씨에게 "야쿠르트가 먹고 싶다"고 보챘다. 야쿠르트 대신 과즙맛 주스를 따라주는 고씨. 스물일곱살 젊은 엄마가 감당하기에 두 아이는 너무 힘들어 보였다.
"제대로 된 일을 찾아야죠. 포기하기에는 아직 젊잖아요." 엄마의 말을 알아듣는 듯 지윤이가 고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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