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역치는 낮아지고

최고경영자(CEO)가 대중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은 그 사람의 기업가 정신 때문이다. 기업가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능력이 있다. 미국 경제학자 슘페터는 낡은 것을 파괴'도태시켜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변혁시키는 기업가의 도전 정신을 창조적 파괴라고 했다. 利潤(이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꾸겠다'는 기업가들의 신선하고 대담한 발상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 '창조적 파괴'가 경제성장의 원동력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것도 CEO 출신이라는 국민적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창조적 파괴' 행동을 보여주었다. 몇년 동안 꿈쩍않던 공단의 '전봇대'를 단칼에 뽑아버렸고, 어린이 성폭행범을 하루 아침에 검거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리고 불이 붙었다. 정부 산하 위원회 273개를 없애버렸고 대표 연봉이 9~10억씩 한다는 공기업들 통폐합에도 나섰다.

어느 대통령도 선뜻 행동에 옮기지 못한 이 대통령의 '쾌도난마'에 국민은 내심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뭔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지율이 20%대로 곤두박질쳤다. 국민 건강을 담보로 한 쇠고기 수입에 국민이 분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연일 밤길을 밝히고 있다. 자존심 없는 '무능한 정권'이란 여론에 밀려 오히려 정부가 대수술 당해야하는 곤경에 빠졌다. 출범 100일 만에 이렇게 급전직하로 떨어진 정권도 없을 것이다.

사실 광우병은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광우병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보면 별로 문제될게 없는데 '그래도 불안하다'는 가정을 하기 시작하면 반박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이 대통령은 틀림없이 '미국 국민도 먹는 쇠고기'를 적당한 선에서 수입하고 그 대가로 수십 조 원의 경제적 효과가 있다는 한'미FTA(자유무역협정)를 성사시킨다면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피해를 보는 축산 농가에 대한 대책에만 골몰했을 것이다. 이것이 대기업에서 일어났다면 '대박'이다. 적은 비용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렸으니 최고의 경영 아닌가.

그러나 정치는 다르다.먼저 국민과의 '소통'이 전제됐어야 했었다. 통치의 대상이 회사원이 아니라 주권을 가진 국민이란 사실을 깜빡한 모양이다. 정운천 농식품부 장관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건강에 대한 국민 눈높이가 정말 높다는 생각을 했다"고 뒤늦게 실토했다. 그리고 "사전에 이런 문제점들을 국민들에게 알렸더라면 현재와 같은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국민을 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못한 정부에 대한 반감과 아쉬움이 이번 사태 확산의 저변에 깔려있음은 사실이다.

생물학에 역치라는 개념이 있다. 신경 세포는 어느 수준 이상의 자극을 받아야 반응을 하는데 반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극 세기를 역치라고 한다. 즉 역치 이하에서는 아무리 자극을 줘도 반응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치가 낮다는 것은 세포가 그만큼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이번 촛불 시위도 국민이 참을 수 있는 역치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으로 국민의 역치가 점점 더 낮아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역치가 낮아지면 과거 같으면 그냥 넘어 갈 사안인데도 국민은 반응하기 시작한다. 정부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불신감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제2, 제3의 촛불은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사사건건 반응하기 시작하면 정부의 추진력에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경제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정치적인 숙제다.

그렇다고 이 대통령의 特長(특장)인 '파괴적 정신'이 주눅 들어선 안 된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파괴돼야할 곳이 많다. 무작정 '밀어 부치기'도 문제지만 일부 국민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손을 놓아버리면 그것은 국민적 저항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이 될 것이다.

이제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신뢰 받을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국민의 역치를 높여 제발 무덤덤하게 살수 있도록….

윤주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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