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포도주 영화의 지혜

"내 인생의 반이 지나갔는데 남에게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어. 고층빌딩 유리창에 묻어있는 지문정도밖에 안 된다고. 나는 100만t의 구정물과 바다로 같이 가는 휴지에 묻어있는 배설물 자국이야."

지독한 자학이다. 배설물보다 못한 자신, 그것도 온갖 폐수와 함께 떠내려가고 있다는 절망적 표현이 가슴을 절개한 채 심장을 채찍질하는 것처럼 아프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포도주 영화 '사이드웨이'에서 주인공 마일즈(폴 지아마티)가 내뱉는 대사다.

'샛길'이란 뜻의 '사이드웨이'는 렉스 피켓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렉스 피켓은 40대에 책 한번 낸 적 없고, 돈도 없고, 이혼도 하고, 그 바람에 술도 많이 마시는 무명 소설가였다. 그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여행기를 소설로 썼다. 지독한 자학에 빠진 작가와 한때 잘나갔지만, 지금은 빛바랜 액션스타가 포도주 농장을 찾아다닌다는 이야기다. 큰 길에서 빗겨난 보잘 것 없는 두 중년 남성이 샛길에서 삶의 참맛을 느낀다는 스토리다.

그러나 무려 15군데의 출판사에 보냈지만, 아무도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도저히 출판해 줄 수 없다'는 거절 통보만 받았다. 어쨌든 책은 출판됐다.

이 소설을 '어바웃 슈미트'를 연출했고,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로 인기가도를 걷고 있는 한국계 배우 산드라 오의 남편인 알렉산더 페인이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단 한곳의 영화사도 제작비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영화가 만들어졌다.

영화가 나오자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자학하며 우유부단하고, 남들과 소통도 하지 않으려는 남자와 여전히 왕성한 성욕으로 사사건건 해프닝을 일으키는 남자의 이야기는 오묘한 포도주의 맛에 비교되며 관객을 감동시켰다.

특히 멋진 날을 위해 그렇게 아끼던 포도주를 허름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먹어버리는 마일즈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불투명한 미래보다 현재에 충실하고, 현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다. 그제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시도하지 않던 마일즈는 새로 만난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린다.

'사이드웨이'는 온갖 문전박대 끝에 만들어진 소설이고 영화다. 숱한 시행착오와 비바람과 폭풍 속에 열매를 맺어 빚는 포도주와 비슷하다. 그래서 '가장 좋은 해'(A good year)에 생산된 포도는 아니지만, 가장 좋은 맛을 내는 영화가 되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포도주 영화 '어느 멋진 순간'(A good year)은 인생의 최고 가치가 돈이라고 여기는 펀드매니저(러셀 크로우)가 포도농장을 상속받으면서 삶의 참맛을 깨닫는다는 영화다.

평생 포도농사를 짓던 헨리 삼촌(알버트 피니)은 그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남자는 실패에서 지혜를 배우는 법이란다. 다만 그게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되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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