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을 갈 때면 수시로 차를 세워두고 길을 물었다. 가끔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받기도 하지만 한두번 길을 묻다 보면 동네 인심도 알게 되고 호젓하고 낭만적인 객지 기분도 느끼곤 했다. 들려오는 모든 주변 소리에 귀 기울였고, 소리와 조화 이룬 풍경들이 살가웠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었다. 내비게이션이 길 찾기를 대신하고, 느긋한 약속시간의 여유를 휴대전화가 빼앗았다. 주위를 가득 채운 소리는 MP3 플레이어가 틀어막았다. 급기야 이것들이 없으면 불안해졌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비게이션
내비게이션이 없는 운전자들도 많지만 한번 써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없으면 불안하다"고 입을 모은다. 올해 운전 경력 12년째인 윤정용(37)씨. 그는 내비게이션보다 지도책을 믿는 '아날로그 운전자'였다. 얼마 전 신용카드를 신규 발급받으면서 포인트로 선구매하는 내비게이션을 장만했다. 그냥 30만원 넘는 장비를 '공짜'로 준다니까 덥석 받아든 것. 처음 한두달은 오히려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수시로 '삑삑' 소리를 내면서 과속 위험을 경고하고, 심지어 과속방지턱까지도 안내해주는 과잉 친절을 베푸는 탓에 시끄러운 동승자 한명 생겼다고 귀찮아했다. 하지만 친구가 여행을 간다며 '귀찮은 동승자'를 빌려간 뒤 금단현상을 느낀다. 윤씨는 "예전에는 도로변 속도제한 표지판을 열심히 보면서 행여 과속단속장비가 있을까봐 조심조심 운전했는데 내비게이션이 생긴 뒤로는 그런 습관이 사라졌다"며 "낯선 길이라도 가게 되면 평소보다 훨씬 신경이 더 곤두선다"고 했다. 도심 외곽을 달리던 중 뒤늦게 과속단속장비를 발견하고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경험을 수차례 했다.
황연주(32·여)씨는 다른 이유로 내비게이션에 푹 빠졌다. 그녀는 예전에 차 안에서 책을 읽으며 여유를 즐겼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이 생긴 뒤 DMB를 보는 재미에 책 읽을 시간을 빼앗겼다. 황씨는 미처 보지 못했던 드라마를 USB메모리에 내려받아 저장했다가 내비게이션에 연결해 보기도 하고, 내장 게임도 즐기곤 한다.
직장인 김재만(42)씨는 내비게이션 때문에 오히려 혼란스럽다. 예전 같으면 한두번만 찾아가면 외워지던 길도 요즘엔 기계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길을 못 찾는다. 김씨는 "한번은 친구를 찾아갔는데 '왜 먼 길로 둘러왔느냐?'는 핀잔을 들었다"며 "내비게이션이 때로는 엉뚱한 안내를 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푸념했다.
◆MP3 플레이어
'뚜벅이족' 최영호(27)씨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MP3 플레이어다. 차를 두고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이 친구의 소중함은 더 절실해졌다. 출·퇴근 시간을 포함해 하루 평균 1시간 30분 이상 MP3를 끼고 산다. 도움도 많이 받는다. 일단 세대 차이를 많이 좁혔다. 직장 회식이 끝나고 노래방에 갈 때마다 최씨는 한 기수 밑 후배들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선배는 왜 구닥다리 노래만 불러요?" 그럴 때마다 최씨는 "옛것이 좋은 것이여"하며 웃어넘겼지만 사실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MP3를 귀에 꽂으면서 그는 최신 노래를 흥얼거리게 됐다. 회식 자리에서 후배들이 "웬일이에요?" 하며 놀려도 속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출근할 때 영어회화를 듣고, 퇴근 길에는 노래를 듣는다. 그는 MP3가 없으면 매우 불안하다고 했다.
고교 2년생 강은석(18)군도 MP3 플레이어 마니아다. 저장용량이 커진 덕분에 웬만한 최신 노래는 물론이고 영어듣기평가도 들을 수 있다. 요즘 영어듣기평가 교재를 사면 해당 출판사 사이트에서 듣기평가를 내려받을 수 있다. 예전에는 따로 영어듣기 공부를 하기 위해 시간을 내야 했지만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장만한 MP3 덕분에 등·하교 시간이 틈틈이 공부하는 시간이 됐다. 강군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듣는 편인데 친구들은 노래를 듣는 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속 편하다"고 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
중학생 한모(14)군은 초교때까지 인터넷 게임에 빠져 살았다. 하루 평균 서너시간은 기본. 집에서도 틈만 나면 인터넷 게임을 즐기는 탓에 부모들은 컴퓨터를 '자녀모드'로 잠가버렸다. 한시간만 쓰고 나면 저절로 컴퓨터가 꺼져버리기 때문에 한군의 속을 새까맣게 태웠다. 한번은 학원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PC방에 잠시 들렀다가 오후 10시 넘어 귀가했다. 그 일을 계기로 집에서는 아예 인터넷을 끊어버렸고, 그때부터 불안증세가 시작됐다. 집에 있는 동안 아무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고 거실을 서성거렸다. 입맛이 없다며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고, 인터넷 연결도 안 된 컴퓨터 앞에 앉아 이것저것 클릭해댔다. 그나마 한군이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은 휴대전화 덕분.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휴대전화를 갖게 되자 수시로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고, 내장 게임을 즐긴다. 일종의 '중독증세'가 인터넷 게임에서 휴대전화로 옮겨오기는 했지만 강도는 훨씬 약해졌다.
회사원 고준석(39)씨는 출근했다가 점심시간에 집으로 돌아간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깜빡 잊고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왔기 때문.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웬만한 전화 연결은 다 할 수 있는데도 불안해 견딜 수가 없다. "거래처나 일과 관계된 사람들이 회사 유선전화로 먼저 연결하는데도 반나절만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해져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며 "점심시간에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가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면 부재중 전화는 한통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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