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마을에서 가장 소중한 곳, 도서관

2천500년 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는 이렇게 써 놓았다고 한다. '우리가 동전을 잃어버린다 해도 가난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큰 도서관에 있는 지식과 지혜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될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도서관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미국 작가 게리 헐이 쓴 '마을에서 가장 소중한 곳'이라는 동화에는 예산이 부족하다며 도서관을 없애려는 정치인들에게서 도서관을 지키려는 사서와 어린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도서관이 우체국이나 시청, 경찰서보다 더 소중한 곳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맨 처음 알리는 것은 놀랍게도 잿빛 산제비이다. 마을의 가장 중심부에 아름다운 도서관을 짓고, 책을 잘 알며 도서관에 대한 사명감에 가득 찬 사서들이 도서관을 가꾸어나가는 이상적인 도서관의 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꿈꾸어왔다. 대구에서 가장 교육환경이 좋으며 부자구인 수성구도 예산 때문에 짓지 못한다는 도서관, 도서관은 정말 돈 먹는 하마일까? 우리나라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 도서관의 소중함을 한번이라도 느껴볼 기회가 있었을까? 빌 게이츠나 스티븐 스필버그처럼 어린 시절 마을도서관에서 꿈을 키운 경험이 있었다면 잿빛 산제비처럼 도서관의 소중함을 외쳤을 것이다.

우리 도서관에는 일요일 아침 도서관 문을 열자마자 찾아오는 어린 손님이 있다. 하루 걸러 한번은 도서관에 와서 두어 시간 책을 보고 빌려가는 일이 습관이 된 이 소년에게 책읽기는 커다란 즐거움이다. 부끄러워서 인사도 제대로 못하는 수줍은 소년이지만 책을 펼치는 순간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행복감에 젖어든다. 이런 아이가 한둘이 아니다. 도서관 문을 닫는 시간이 되어 모두 빠져나가고 난 다음에도 정신없이 책읽기에 몰두하는 아이들이 있다. 다른 도서관보다 조금 늦은 오후 8시에 도서관 문을 닫는데도 아쉬워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근엄한 교수님도 도서관에 올 때는 슬리퍼와 반바지 차림으로 동네 마실 오듯 가볍게 들어선다. 그을린 얼굴에 작업복 차림으로 책을 빌려가는 아저씨, 책을 한 권 펼쳐놓고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이따금 눈을 들어 앞산을 바라보며 한참을 쉬었다 가는 아주머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커다란 자전거를 끌고 낑낑거리며 오는 아이, 책이 잔뜩 든 도서관 가방을 유모차 아래 칸에 싣고 아기를 태우고 오는 젊은 엄마들, 출장 때문에 책 반납이 늦었다고 사과하는 청년, 딸을 따라 와본 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고 한 권 뽑아 드시는 할아버지. 이런 분들이 우리 도서관의 단골고객들이다. 책 반납이 늦어서 미안하다며 빵을 사들고 오기도 하고, 과일이 맛있어 보여 사왔다며 참외를 한 봉지 건네기도 하며 시골 어른이 농사지었다는 푸성귀를 싸오셔서 주시는 분들. 그런 분들이 있어 늘 따스하다. 아파트와 주택이 밀집한 주거단지에 있어서 걸어서 올 수 있다는 것 말고도, 우리 도서관만이 지닌 장점이 몇 가지 더 있다.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며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려고 노력하고, 내 아이에게 읽힐 책이라는 마음으로 정성껏 아이들 책을 골라 들여놓는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도서관을 믿고 찾아온다.

지난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도서관 만들기와 책읽기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사업으로 도서관 만들기에 관심을 돌린 정치가들이 늘어난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도서관 만들기와 책읽기 운동을 벌여온 시민단체와 뜻있는 시민들 덕분이기는 했지만, 모처럼 불어온 훈풍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도서관을 운영할 전문 인력에 대한 고민이 없어 보여 아쉽기는 했지만, 도서관이 부족한 지역을 중심으로 작은 도서관 만들기가 조금씩 시도되기도 했다. 그런데 새 정부 들어 영어몰입교육이니 영교시 부활이니 하면서 책 읽는 분위기가 위축되는 느낌을 받는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와서 학원 한두 군데 돌고나면 도서관 올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이들에게 영어와 수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책읽기라고, 심심하면 달려와 마음에 드는 책을 읽으며 뒹구는 아이들은 나중에 자라서도 책읽기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행복한 어른이 될 거라고 말한다. 고대에는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라 불렸다는 도서관이 속도와 경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는다.

신남희 새벗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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