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침대.
제법 잘 어울리는 구도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나에'가 황홀한 눈빛으로 내려 보고 침대 머리맡에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이 반쯤 펼쳐져 있고, 거기에 외로움에 목마른 입술이 있다면 그 정취는 더하다.
곧잘 와인은 삶과 사랑에 비유된다. 서로 다른 맛과 오묘한 빛은 서로 다른 이들이 만나 빚어내는 사랑과 닮았다.
핑크에 가까운 붉은 보랏빛의 보졸레 누보는 흥분된 첫사랑의 맛이고, 키스할 때는 달콤한 옐로 테일이, 상큼한 맛의 사모스 쿠르타키는 욕실에서 젖은 몸으로 나와 마시고, 로제와인에는 남자의 향취가 배어있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때는 인비노 베리타스를…. 이런 식의 와인분류법은 최근 와인애호가들이 늘어나면서 사랑의 오브제처럼 받들어지고 있다.
이 소설은 사랑, 또는 섹스를 와인의 다양한 맛과 느낌에 비유하고 있다. 주인공은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서른세살의 독신녀다. 20살이 넘는 나이차의 애인을 위해 가정을 내팽개친 아버지와 그 그늘에 허덕대는 어머니를 보면서 독신을 고수하고 있다.
그녀는 바에서 마시는 술잔만큼이나 많은 성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중학생 시절 손가락으로 처녀성을 빼앗아간 대학생 사촌 오빠에 첫사랑인 가난한 대학생 진우, 원 나이트 스탠드를 기대하며 기웃대는 숱한 남자들과 현재 가끔 만나 섹스를 나누는 세호라는 젊은 유부남 변호사도 있다.
진정한 사랑 없이 섹스만 추구하는 그에게 점차 회의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이제 신세대 잡지에 '21세기 유망직업'이란 연재물을 기고하면서 항공관제사와 색다른 사랑을 시작한다. 와인을 마시며 첫 관계를 가진 후 이 남자를 통해 와인의 세계와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성적 쾌감을 느낀다.
그와 사랑을 나눌 때면 항상 와인이 곁에 있다. 에스쿠도 로호, 로제와인과 몬테스 알파, 돔 페리뇽…. 그는 그녀에게 와인이란 별칭을 지어주고, 치즈라는 애칭까지 붙여준다.
소설은 와인과 함께 찾아든 한 남자를 통해 진정한 사랑에 안착하려는 한 여자의 감정과 욕망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다. 무엇보다 와인에 대한 세밀한 묘사들이 성적 유희와 잘 어우러지는 것이 흥미롭다. '그의 애무가 시작되었다. 그는 나의 쇄골부분을 실로폰처럼 입술로 두드렸고, 수줍어하는 성기를 포도밭으로 만든다. 가장 좋은 포도밭은 강가와 안개가 있는 곳이라고 했던가? 나의 성기는 지하 저장고의 카브가 된다.'
남자의 욕망이라는 것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미끈거리는 콘돔이고, 남녀의 사랑도 결국 콘돔에 남아 있는 정액처럼 성적유희에 불과하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이를 부정하지 못하는 욕망이 특히 잘 그려져 있다. 욕망의 표현 수위도 꽤 높은 편이다. 영화와 문학, 그림 등을 통한 와인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지은이는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199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으며 올해 계간 '문학의 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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