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기섭의 목요시조산책] 부레옥잠이 핀다/손영희

1

그 여자, 한 번도 수태하지 못한 여자

한 번도 가슴을 내놓은 적 없는 여자

탕에서, 돌아앉아 오래

음부만 씻는 여자

어디로 난 길을 더듬어 왔을까

등을 밀면 남루한 길 하나 밀려온다

복지원 마당을 서성이는

뼈와 가죽뿐인 시간들

2

부레옥잠이 꽃대를 밀어 올리는 아침

물속의 여자가 여행을 떠난다

보송한 가슴을 가진 여자

잠행을 꿈꾸던 여자

푸른 잠옷을 수의처럼 걸쳐 입고

제 몸속 생의 오독을 키우던 그 여자

누군가 딛고 일어서는

기우뚱한 생의 뿌리

어디로 난 길을 어떻게 더듬어 왔는지는 모르지만, 여자는 지금 복지원에 있습니다. 뼈와 가죽뿐인 시간들이 복지원 마당을 서성입니다. 살과 피는 어디로 갔을까요. 등을 밀자 등줄기를 따라 남루한 길 하나가 밀려옵니다. 오, 이런! 살과 피는 진작 그 길에 다 주어버렸군요.

여자는 수태는커녕 어디라 가슴 한번 내놓은 적 없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그 욕망이 여자를 오래 돌아앉아 있게 합니다. 씻고 씻은 것을 자꾸 씻어 문드러지게 합니다. 그런 날 아침의 부레옥잠. 물속에 잠긴 채 꽃대를 밀어 올리는 부레는 곧 여자의 꿈입니다. 부레 때문에 여자는 아직도 보송한 가슴으로 잠행을 꿈꾸고, 먼 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부레가 터지면 여자의 꿈도 터집니다. 복지원 뜰에 낭자할 꿈의 껍질들. 여자가 제 몸속에 키워온 생의 오독이 뉘한테는 딛고 일어설 생의 뿌리가 됩니다.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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