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구선신풍(舊扇新風)

재작년 이맘때로 기억합니다. 사무실에서 책을 찾다가 책꽂이 안쪽에 놓여 있는 합죽선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부채 옆에 동그란 작은 상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전주의 무슨 공예라고 쓰여 있고 전화번호 국번이 한자릿수였습니다. 80년대 중반 어느 날 전주에서 합죽선을 샀던 일이 어슴푸레 떠올랐습니다. 부채를 펴 보니 종이도 일부 찢어진데다 누렇게 바래고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면(扇面)에 아무 그림이나 글씨가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슬그머니 글 하나 써보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어라고 쓸까 고민하다가 글귀 하나를 지어냈습니다. 구선신풍(舊扇新風)이었습니다. '비록 오래된 부채이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저도 이제 오래된 부채에 들어가는 세대가 되었지만, 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 애쓰겠다는 다짐도 곁들이면서 말입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신선구풍(新扇舊風)이나 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졸필임을 무릅쓰고 붓으로 구선신풍 네 자를 선면에 썼습니다. 그리고 여름 내내 그 부채를 들고 '시원하게' 다녔습니다.

각설하고, 모름지기 박물관은 구선신풍과 같은 구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박물관의 모토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아가는 발신지가 바로 박물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현실과 미래를 창조해내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를 찾아내고 가꾸고 지켜내야 합니다. 그 과거를 익히고 비추고 깨달아 새것으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창신(創新)의 출발점으로 박물관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물관과 문화유산에 대한 강연 때마다 즐겨 인용하는 글귀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온고지신(溫故知新)부터 시작하여 법고창신(法古創新) 온고창신(溫故創新) 고고구신(考古究新) 입고출신(入古出新) 그리고 박고통금(博古通今) 조고관금(照古觀今) 등등입니다. 알다시피 서로 비슷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뜻을 지닌 사자성어들입니다. 구선신풍과도 통하는 말들로서 박물관의 구실을 이야기하며 들곤 합니다.

작년 말 방문했던 타이완의 국립고궁박물원에서는 'Old is New'라는 기치 하에 공격적인 마케팅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활동을 대내외에 벌이고 있던 것이 기억납니다. 원시(原始)와 전위(前衛)는 상통(相通)하는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말입니다. 미국 소설가 포크너의 말이라는 이 구절도 생각납니다.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아직 지나간 것도 아니다.'

이영훈 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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