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소회' 작품집 내는 百壽 허숙희 할머니

"아리랑 고개 열두 고개 뿐이건만 내 인생 고개는 헤아릴 수 없구나"

"오래 산게 무에 자랑입니까.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지난 11일 100세를 맞이한 허숙희 할머니는 "축하를 받는 일이 부끄럽기만 하다"며 굳은 얼굴을 내내 풀지 못했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는 그리움이 애잔하게 묻어났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아들 이표진(77세 별세)씨를 잊지 못함이다. "하느님도 무심하지시. 왜 날 이리 오래 살게 하실꼬. 얼릉 가서 아들 얼굴이라도 보고싶건만…."

허 할머니는 39세에 6·25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1남 3녀를 키웠다. 어느 자식 하나 예쁘지 않은 자식이 있겠느냐마는 할머니에게 맏아들은 정말 말 그대로 '금지옥엽' 같은 자식이었다. 7대 독자였던데다 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대통령 훈장까지 받은, 어딜 내놔도 자랑스러운 아들이 지난해 췌장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세인의 눈으로는 그리 이른 죽음이 아니건만 자식을 앞세운 어미의 마음에는 심장에 대못 하나 박은 것만 같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지난해 말, 세 딸과 손자 손녀들이 힘을 모아 할머니의 첫 작품집을 발간했다. 아들이 살아 생전 그렇게 애를 기울였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큰딸 을진(73)씨는 "평생 글 쓰는 것을 즐기셨던 어머니를 위해 오빠가 100세 기념 선물로 책 간행을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며 "오빠가 있었다면 더 훌륭한 책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할머니의 첫 작품집의 이름은 '나의 所懷(소회)'. 처음 시집을 와 오빠와 주고받은 서찰에서부터, 손자를 봤을 때의 기쁨, 77세에 다녀왔던 미국 여정기 등 틈틈이 써내려 간 할머니의 글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집에는 가는 붓으로 빼곡히 적어내려간 두루마리 화선지가 할머니 방 한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을 정도였다. 한학을 공부하셨던 외조부에게 글을 배운 할머니는 전형적인 내간체 문장을 구사하고 있었다.

"인생의 한평생이 백년이 아니건만 원통한 내 인생은 우우풍풍 몇 굽이며 고개고개 몇 고갠고. 아리랑 고개 많다하나 열두 고개뿐이건만 내 고개는 헬 수 없다. 고개고개 넘다보니 쉬지않고 도지는고. 어언간 망팔이라 얼척없고 가관이다. 내 한 일이 무엇이고 정신수습 못할네라. 지난 역경 회고하니 잘한 일은 하나 없고 죄중에서 살았구나."(나의 所懷 중 일부)

허 할머니의 생활 신조는 '일시를 참으면 백날이 편하다'라고 한다. 11년 동안이나 몸져 누워계셨던 시어머니 수발을 했고, 남편이 세상을 뜬 뒤 하숙과 삯바느질을 하며 자식 넷을 대학공부까지 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인내'의 자세가 몸에 밴 덕분이었다. 셋째딸 영자(65)씨는 "선생님 같고, 친구 같고, 세상에 더넓은 이해심을 가진 어머니를 둬 행복하다"며 "어머니의 말씀 중 가장 가슴에 남는 것이 '세상을 살면서 30%를 표현하고 70%를 가슴에 새기면 집안이 편안하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요즘 귀가 어둡다. 귀 가까이에 대고 반복해 이야기해야 겨우 말을 알아들으실 정도다. 자식들이 몇 번이나 보청기를 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지만 할머니는 완강히 거부하셨다고 했다. "늙은이가 귀가 밝아서 많은 것을 듣고 자꾸 간섭하면 서로 불편하다"는 이유다. 허 할머니는 "꼭 필요한 이야기는 귀에 대고 크게 말해주니 들어야 할 것만 골라 들어 좋다"고 하셨다. 눈도 귀도 어둡지만 그래도 아직 야구·농구·축구 중계는 빼놓지 않고 볼 정도고, 요즘 촛불집회 사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취재 도중 할머니는 간만에 밝은 웃음을 보이셨다. "내가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기라"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할머니는 자신의 글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내심 기쁘기도 하면서 부끄러우셨나보다. "문(文) 문같지 않고 필(筆)도 필같지 않은 것을….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라고 거푸 되풀이하셨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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