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중년의 신혼' 가능할까?…50대의 적 '빈 둥지 증후군'

"나이 오십은 무슨 재미로 살까? 자식들은 저마다 날갯짓을 하며 떠나버렸고, 남편은 일과 회식을 핑계삼아 하루가 멀다하고 늦는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 '영식님, 일식씨, 이식군, 삼식새끼(삼시세끼)'라지. 하루 한끼도 집에서 안 먹어서 아내를 귀찮게 하지 않는 남편을 '영식님'으로 깍듯이 모시고, 세끼를 꼬박꼬박 집에서 챙겨먹는 남편을 '삼식새끼'라며 욕한다지만 둘 다 마뜩찮다. 젊은 시절, 한 직장 선배가 무심코 던진 말이 떠오른다. '나이 오십이 돼서 비 오는 날, 창밖을 내다보며 아련히 떠오르는 사람 한명 없다면 그 인생은 참 심심하게 산 거야.' 첫사랑을 떠올려보지만 이내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고 만다. 내 인생을 잊고 살아온 지난 20여년. 무슨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고 후회가 남는 것도 아니다. 그저 허무하고 무기력할 따름이다. 오늘도 혼자만의 식사를 해야겠지."(취재중 만난 동네 아줌마의 말)

젊은 시절 의미도 모르고 열창했던 최성수의 노래 '동행'이 새삼 입가에 맴돌고, 'TV를 보면서'라는 곡이 라디오에 흐를 때면 주책없이 눈물 주르륵 흐르는 나이. 흔히 '빈 둥지 증후군'으로 불리는 40대 후반, 50대들의 외로움과 허무감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황혼 이혼'도 너무 늦다며 '대입 이혼'을 서두르는 세대.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대학 진학, 입대로 자식들을 떠나 보낸 뒤 오히려 '대입 신혼'을 맞이하는 부부들도 많다.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들의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생각하는 50대

주부 조윤자(가명·52)씨. 작년에 둘째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떠나버리자 부부 둘만 남게 됐다. 남들은 신혼이 찾아왔다고 놀려댔지만 정작 조씨는 말할 수 없는 허무감에 휩싸였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세상에 버려진 느낌. 어쩌다 일찍 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하소연했지만 역효과였다. "아이 다 키워놓고 이제 먹고살만 하니까 별 소리를 다하네. 남들처럼 친구를 만나든지, 아니면 부업거리라도 찾든지.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잔뜩인데 당신까지 날 힘들게 할 거야?" 남편과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퇴근해도 밥만 차려주고 조씨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한두잔씩 마시던 와인은 하루 한병꼴로 늘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보면서 "미친×"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살림살이도 엉망이 됐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고, 하루 종일 집에서만 지냈다. 처음 몇달간 인터넷 쇼핑에 빠져 지냈지만 그것도 흥미를 잃었다. 사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조씨는 남편에게 "이대로는 못 살겠다. 차라리 헤어지자. 그것도 아니면 죽어버리겠다"고 퍼부었다. 그제야 심각함을 깨달은 남편은 아내와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진단 결과 우울증 초기였다.

조씨는 '빈 둥지 증후군'을 겪는 전형적인 사례다. 가정이 빈 둥지가 되고 자신은 빈 껍데기 신세가 되었다는 심리적 불안감인 것. 부부상담 전문가인 대구가톨릭대 제석봉 교수(사회복지학과)는 "가정이라는 틀에 갇혀 살면서 인간관계의 전부가 가족뿐인 전업주부들은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난 뒤에 찾아오는 상실감을 견딜 수 없다"며 "음주와 도박, 쇼핑 중독 등 다양한 증상을 보이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빈 둥지 증후군'을 이겨낸 주부들

권윤숙(가명·50·수성구 두산동)씨. 남편과 두살 차이이고, 25세 큰아들은 대학에 갔고, 20세 둘째 아들은 서울에서 재수를 하고 있다. 지난 2월부터 남편과 둘만 지낸다. "아이가 있다가 갑자기 없으니까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어요. 대화도 적어지고. 아이에게 너무 집착한 탓인지 마음도 울적했어요. 다행히 이젠 적응이 돼 남편과 둘이 있는 게 편해요."

개원 의사인 남편은 오후 7, 8시면 집에 돌아온다. 첫사랑의 설렘은 없지만 남편에게서는 친구처럼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평일 저녁엔 함께 운동하고, 나머지 시간은 각자 방에서 TV 보거나 책을 읽는다. 대화는 많은 편. 주제는 가정경제나 아이의 장래에 관한 것이다. "외식할 때는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고, 집에서는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빈 둥지 증후군'도 잠시 느꼈지만 이겨냈다기보다는 그냥 지나간 셈이라고 했다. 성당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친구들과 만나 수다도 떤다. 남편은 가정적인 편이고, 늘 감사하며 사는 자세가 상실감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

김미숙(가명·49·수성구 범물동) 주부는 아이들이 떠난 뒤 일년 정도 '대입 신혼'을 느꼈다고 했다. "둘째 아들이 작년에 서울로 가고 난 뒤 몇개월은 새롭고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옛날 느낌도 살아나고 퇴근하는 남편이 기다려지기도 하고. 남편도 걱정스러웠는지 출근하면 전화 자주 하고, 저녁에 늦으면 꼭 전화했죠. 일년 정도 지나고 나니까 다시 원점이더군요."

그래도 서운하지는 않다고 했다. 적응할 시간을 벌어준 셈이니. 함께 운동을 하기에 대화 주제도 풍부하다. 오히려 아들들이 있을 때보다 싸움도 적게 하고 이해의 폭도 커졌다. '대입 신혼'이 끝난 지금은 남편보다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좋다. 등산도 함께 다니고, 고민을 털어놔도 남편보다 훨씬 잘 이해해 준다. "아들들이 딸처럼 살갑게 대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든든합니다. 지금도 행복지수로 따지면 옛날과 별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아쉬운 것은 전업주부로 살다 보니 계속 직장을 가지고 있는 주부가 부럽다는 거죠."

◆자녀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을 버려라

한국 사회에서는 돌을 맞을 수 있겠지만 세태를 냉철하게 바라보자면 굳이 못할 말도 아닐 성싶은 말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인을 바꿔라'이다. 중년의 불륜을 조장하는 말은 물론 아니다. 결혼 후 신혼기간 잠시 남편과의 알콩달콩한 생활이 유지될 뿐 아이 낳고 나면 '꿈 같은 신혼'은 후딱 지나간다. 시도 때도 없이 아프고, 배고프다고 심심하다고 보채고, 제 발로 걷게 되면 교육 문제 때문에 온갖 정열을 소비하게 하고, 머리가 굵었다 싶으면 제 고집만 피우며 돈은 왕창 깨먹는 '제 멋대로식 애인'(자녀)을 떠나보내고 나이 오십이 넘어 성격도 한풀 꺾이고 아내 안면 근육의 이완과 수축 여부까지 살펴가며 눈치를 볼 줄 아는 '고분고분형 애인'(남편)을 가슴으로 품어줄 때가 됐다는 말이다. 비 젖은 낙엽처럼 신발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며 불평해 봐야 남편만한 존재도 없다. 서걱거리는 마른 낙엽보다는 훨씬 살갑지 않은가?

프랑스 심리학자 코린느 마이어는 저서 '노 키드(No Kid):아이를 낳지 말아야 할 40가지 이유'에서 '자식과 결별해야 할 이유'를 밝히고 있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수많은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 가령 밤늦게 영화보기, 남편과 단둘이 여행하기, 늦잠자기, 교육비 신경 안 쓰고 쇼핑하기 등등. 기꺼운 마음에 행복마저 포기했지만 그것을 자녀가 알아주지 않을 때 푸념처럼 퍼붓는 말도 수학공식처럼 똑같다.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네 행복을 위해, 네가 제대로 교육받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는 지금껏 주었던 사랑을 돌려달라는 계산적 생각도 숨어있다. 떠나버린 자식들에게 "어떻게 네가 이럴 수가?"하며 푸념해봐야 소용없다.

부모가 되는 일은 인간의 '반복적 실수' 중 하나라고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인 대니얼 길버트는 주장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하지만 자녀 양육도 희생을 요구한다. 길버트 교수는 오히려 자녀를 둔 사람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낮다고 말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했던 부부들은 자녀가 생긴 뒤 만족도가 차츰 낮아졌다가 자녀가 떠나면서 만족도를 회복한다는 것. 물론 여기에는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전제조건이 따라야 한다. 자녀가 떠나버려 공허한 것이 아니라 드디어 자녀에게 해방된 즐거움을 만끽하라는 의미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 빈 둥지 증후군이란?

부부가 서로에게 무관심해지고 자식도 대학 진학·입대·취업·결혼 등으로 가정을 떠나면서 중년의 여성이 겪는 정체성 불안을 말한다. 정신적 불안정과 우울증, 허탈감을 보일 수 있다. 중류층 이상의 가정에서 많이 발생하고, 자녀에 대한 기대감이 큰 부부일수록 증상은 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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