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중원 무림에 신비의 고수가 출현합니다. 일격필살! 그가 구사하는 초식은 기존의 무림고수들로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소림, 무당, 화산 등 구대문파 장문인들이 그의 칼 아래 차례차례 무릎을 꿇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남쪽바다 범선에 은거해 사는 절대고수 한명뿐. 신비고수와 절대고수는 최고수 자리를 놓고 숙명의 대결을 벌입니다. 결과는 무승부. 신비 고수는 무술을 다시 갈고 닦아 10년 뒤 재대결하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절대고수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치명적 내상을 입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10년 뒤를 도모하기 위해 절대고수는 후계자 물색에 나섭니다.
학창시절 읽은 무협소설의 도입 장면입니다. 손에 땀을 쥐며 흥미진진하게 빠져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생뚱맞게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요즘 시국과 오버랩됐기 때문입니다.
촛불집회를 시작한 것은 디지털 신세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성세대와 다른 문법으로 사고하고 다른 채널로 소통합니다. 디카와 휴대전화로 무장하고 인터넷으로 토론합니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서 검색되는 지식은 대백과사전을 위협하고, 블로거들이 생산해내는 뉴스는 매스미디어의 영역을 넘봅니다. 김지하 시인은 신문 기고를 통해 '동·서양의 어떤 학문을 공부한 학구적 집단도 그들의 지혜와 대결하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이문열 작가는 촛불집회에 대해 "본질은 위대하면서도 한편으로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의 승리"라고 했습니다.
정부는 디지털 신세대의 내공에 대해 깜깜했습니다. 지난해 12월 대선과 올해 4월 총선 압승의 달콤함에 도취돼 있던 정부·여당의 눈에 비친 디지털 신세대는 그저 괴담을 퍼나르는 철부지였을 뿐입니다. 첫단추를 잘못 꿴 후유증은 엄청납니다. 침묵하던 대중들이 촛불정국에 동참하는 민심의 큰 흐름을 읽어내지 못한 정부가 한 것이라곤 잇단 '자책골'이었습니다. 촛불 정국을 보면서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라는, 평범하지만 무서운 진리를 새삼 깨닫습니다.
약간 오래된 유머가 있습니다. 인적 드문 시골길을 세 사람이 건너는데 경찰이 막아섭니다. 경찰이 말합니다. "경찰서로 가자. 앞장 선 너는 주동자다. 중간에 선 너는 핵심인물이고." 얼떨결에 뒤따라 건넌 사람이 묻습니다. "저는요?" "입 다물어. 너는 배후세력이야."
정부는 '촛불시위 배후세력'을 운운했지만 고비 때마다 촛불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다름 아닌, 정부였습니다. 뒤늦게 정부는 쇄신하고 소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촛불 시위대를 막겠다며 경찰이 광화문 도로에 쌓은 것은 흉물스런 컨테이너 장벽이었습니다. 그곳은 경제 대동맥을 씽씽 달려야 할 컨테이너 상자들이 있을 자리가 아니지요. 광화문의 컨테이너는 요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동맥경화의 상징물 같습니다. 정부로서도 선택할 카드가 마땅찮고 국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는 답답한 상황의 터널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광화문 거리에 서서 침묵하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김해용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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