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과 육지를 이은 아름다운 삼천포대교를 건너 삼천포에 들어섰다. 삼천포항에서 해변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작은 도로를 지났다. 금홍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 어렵게 도착한 노산공원. 바다를 끼고 언덕 위로 작은 오솔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방파제가 길게 길을 만들고 빨간색을 가득 머금은 등대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웠다. 언덕 위에는 바람으로 가득했다. 박재삼 시비를 만났다. 돌인지, 쇠못인지로 인해 시비 몇 곳이 날카롭게 그어져 있었다. 정말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의 심리를 알 수 없다. '우리 고장이 낳은 시인 박재삼의 시비를 그가 늘 올라 바라보기를 즐기던 이 한려수도의 한 복판 노산공원에다 세워 세월과 함께 오래 기린다'는 마음을 더럽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시비에는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 아, 보아라 보아라 /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는 박재삼의 '천 년의 바람' 앞부분이 담겨 있었다. 시비 앞에 서서 조용히 묵념을 올렸다. 평생을 가난과 병마로 아팠던 시인의 고통을 생각했다.
시인에 대한 삼천포 사람들의 사랑은 각별하다. 최송량 시인 등 사천 지역의 문인들은 시인의 시 중에서 고향과 관련된 작품 110여편을 따로 모아 '우리 고향 우리 집'이라는 시선집을 펴내기도 했다. 또 현 사천시 동서금동 팔포 바닷가에서 자란 시인의 생가 바로 앞 바다는 최근 매립돼 음식점과 숙박시설이 줄지어 들어서 있지만 팔포 매립지 해안도로를 '박재삼 시인의 거리'로 조성할 예정이라고 했다.
내려오는 길, 다시 시인의 시를 새긴 시비를 만났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내가 시인을 처음으로 알게 만든 작품. 어느 겨울 친구와 다투고 친구가 보낸 엽서에 적혀 있었던 시. 강물처럼 흐르는 삼천포 앞바다 물결 위에 붉은 노을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시를 읽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 저것 봐, 저것 봐, / 네보담도 내보담도 /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 소리가 사라지고 /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전문)
'저녁노을'을 울음에다가 환치시켜 표현한 것이 절묘하다. 아름다움을 슬픔이라는 감정에 결부시킨 것은 시인다운 발상이다. 슬픔도 지극하면 아름다움이다. 이 시가 슬프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시인의 삶이 가난과 병으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삶이었지만 아름다운 것도 이러한 정서 때문이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 물론 서러운 사랑 이야기는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 이야기일 게다. 이야기와 함께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 흐른다. 노을에 불타는 가을 강의 모습은 황홀한 정도로 아름답다. 슬픈 사랑이 슬프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결국 지극한 아름다움은 화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게 한다. '저것 봐, 저것 봐' 이것은 황홀함의 절정에서 터져 나오는 언어이다. 슬픔의 절정에서 쏟아져 나오는 언어이다.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이 마지막으로 뱉는 소리이다. 슬픈 삼천포의 해질 무렵 풍경이 박재삼의 마음 풍경과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삼천포 시장으로 차를 돌렸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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