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이들이 있다. 이 같은 숭고한 희생이 밑거름이 돼 오늘의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매일신문사가 주최하고 대구보훈청이 주관하는 '2008 매일보훈대상' 시상식이 19일 오후 3시 대구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에서 마련된다. 상이군경·유족·미망인·장한 아내·특별 무공수훈 부문 등 5개 부문에 걸쳐 대구와 경북에서 각각 5명씩 10명이 수상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나라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선열들의 행적이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는 요즘, 자신의 이익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실천해온 수상자들의 삶은 전후세대에게 훌륭한 귀감이 된다.
◆상이군경 부문 권정수(73·수성구 만촌1동)씨
1955년 8월 육군에 입대해 1통신단 65지원대대 1중대에서 근무했던 권씨는 1958년 차량전복사고로 좌요골 및 척골 골절상을 입고 1960년 11월 명예 전역했다. 이후 대한미곡 창고주식회사 안동지점(현 대한통운)에 입사해 21년간 근무하면서 보훈연금 8년치를 안동보훈지청에 불우회원 돕기 성금으로 기탁하는 등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상이군경회 대구광역시지부 서구지회의 지도원 감찰, 자문위원 동우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국가유공자들의 친목과 복지향상에 앞장서왔다.
◆유족 부문 이주애(61·여·달서구 두류2동)씨
1946년 생으로 무남독녀였던 이씨는 6·25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이후 남편과의 이별, 유방암 선고 등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씨는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전몰군경유족회 대의원직을 맡으면서 사회복지관에서 무료급식봉사활동, 홀몸노인 집안청소, 밑반찬 제공 등 아낌없는 도움을 줬으며, 유족회 여성회원들을 인솔하고 태풍피해 지역을 찾아가 복구활동을 돕기도 했다. 또 유족회 호국부녀회 2대 회장을 지내면서 회원들의 유대와 복리에 힘쓰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미망인 부문 장숙선(77·수성구 범어4동)씨
열 여덟살이 되던 해 종갓집 맏며느리로 들어온 장씨. 그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년 만에 남편이 6·25전쟁으로 군입대한 뒤 유복자 아들을 낳았지만, 남편은 아들 한번 보고 '행복하다'는 편지 한장 보내온 뒤 전사하고 말았다. 그후 20년 동안 남편의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가 아들이 경북대 사범대에 입학하던 해 겨우 서울국립묘지에서 싸늘한 시신과 묘비로만 남은 남편을 만나볼 수 있었다. 장씨는 "아들을 훌륭히 키워내는 것만이 남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며 삯바느질과 남의 집 궃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아들의 학비를 벌어가며 고난의 세월을 헤쳐왔다.
◆장한 아내 부문 서우순(70·남구 대명10동)씨
이웃집 아저씨의 소개로 만난 남편 황재학씨는 6·25전쟁으로 전신에 화상을 입은 중상이자였다. 놀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서씨는 1년 6개월간의 만남 끝에 황씨와 결혼을 마음 먹었다. 당연히 결혼생활은 힘들었다. 노동능력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 날품팔이 등 돈을 벌 수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1남2녀를 길러내는 것도 서씨의 몫이었다.
서씨의 헌신적인 내조 덕분에 남편 황씨는 장애를 딛고 상이군경회 지회장을 역임하는 등 30년간 상이군경회를 위해 모범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다.
◆특별 무공수훈 부문 백경암(79·달서구 송현2동)씨
1929년생인 백씨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해 8사단 16연대에서 원주지역 전투를 시작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후 1954년 10월 화랑무공훈장을 수상하고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해 24년을 봉직한 뒤 1974년 정년 퇴임했다.
백씨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강한 체력과 책임감, 굳건한 애국심으로 8년간 단체의 사무장이라는 무료봉사직을 맡아오고 있으며, 매달 2, 3회씩 거리질서캠페인과 청소년보호, 예절교육 등의 봉사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상이군경 부문 백우현(78·상주시 남성동)씨
백씨는 상이군경회 상주시 지회장을 맡으면서 매년 태극기 수백개를 구입해 주민들에게 배부하고, 명절마다 상주보육원을 방문해 원생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또 혼자살고 있는 상주지역의 불우회원 가정을 방문해 밑반찬에서부터 세탁, 청소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쳤다. 2002년과 2003년 상주지역의 폭우와 폭설 피해때 읍·면사무소를 직접 방문해 피해를 입은 국가유공자들이 적절한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그는 상이군경회 단체복을 만들기 위해 상주시청에 취지를 설명하고 예산을 지원받아 보훈단체 회원들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유족 부문 김을룡(73·의성군 비안면)씨
김씨는 1981년 육군 상병이었던 아들 형환씨를 잃었다. 하지만 김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1985년부터 7년간 유족회 의성군 지회장을 맡고, 이후에는 2년간 유족회 경상북도지부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며 의성군 보훈단체 회원들의 숙원사업이었던 보훈회관을 만드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김씨는 아들을 잃기 이전에도 다양한 사회 활동을 벌여온 공로로 1973년에 국무총리표창을 받기도 했다. 야학을 운영하고 새마을 구판장을 개설하는 등 농촌 부흥에 헌신해왔으며, 1973년에는 홍수로 유실된 철교를 만들기 위해 성금을 모으고 자비를 털기도 했다.
◆미망인 부문 서점남(74·의성군 의성읍)씨
서씨의 남편은 6·25 도중 용전 전투에서 파편을 맞아 왼쪽눈을 실명하고 제대했으나 계속되는 염증과 통증으로 1966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1남 1녀를 둔 서씨는 이후 생계를 위해 도리원 태성공장에 입사해 24년을 일하면서 국가유공자 유족으로 성실히 근무한 공로를 인정받아 의성군수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2005년 5월부터 전몰군경미망인회 의성지회 회장을 맡아 지금까지 계속 일해오고 있는 서씨는 노후된 의성군 충혼탑을 재건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 2006년부터는 '이동보훈팀'을 꾸려 어려운 회원들을 직접 방문해 위로·격려하는 복지지원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장한 아내 부문 오정자(69·성주군 성주읍)씨
오른 다리를 절단한 상이군인이자 두 아이를 둔 남편 김도희씨를 일으켜 세운 것은 오씨의 극진한 사랑이었다. '새엄마'라며 차갑게 대하던 아이들을 보듬어 키우고, 치매에 걸린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며 시누이 3명도 출가시켰다. 불구의 몸으로 사업을 하려던 남편은 가는 곳마다 냉대를 받았고, 결국 생계를 책임진 것은 오씨였다. 4명의 자식 모두 훌륭히 키워냈지만 오씨는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 1983년 자궁암 판정을 받고 5년 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하지만 타고난 성품이 고운 오씨는 마을사람들을 돕는데 앞장서 마을 부녀회 감사와 반장으로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특별 무공수훈 부문 김성곤(75·경산시 사동)씨
6·25 전쟁 때 17세의 나이로 학도병이 된 김씨는 김화 530 고지를 탈환·사수한 공로로 1952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지만 1953년 11월 강원 사창리 전투에서 부상당해 명예제대를 하게 됐다. 이후 그는 경산농협에서 30년간 근무하며 영농발전에 기여했고, 충혼탑 정비와 보훈회관 신축에도 힘을 보탰다. 또 지자체와 협조해 국가유공자들이 쓰레기 봉투를 무상공급하고 상수도 기본료를 면제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현충일 및 명절에는 위문품을 지급받고, 현충원 참배 및 격전지견학비용 등의 사업비가 책정될 수 있도록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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