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대구 달성군 유가면 용봉리. 비슬산 자락을 따라 넓은 들판이 펼쳐진 이곳은 여느 시골 마을처럼 평화로웠다. 이따금씩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 며칠 전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동네라고는 도무지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노인들만 사는, 겉보기에는 '범죄 없는 마을'로도 손색없을 이 마을은 지금 허은정(11)양 납치살해 사건으로 공황 상태였다.
마을 입구 당산목 아래에서 만난 노인들은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기자가 사건 얘기를 꺼내자 한 노인은 "내가 여기서 80년을 살았는데, 곡식을 길가에 내놔도 가져가지 않는 곳이다. 요즘 동네 분위기가 말이 아니다"고 한숨을 쉬었다.
경찰은 일부 노인들을 제외하고 용봉리에 거주하는 웬만한 남성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구강 조직을 채취했다. 허양 시신에서 발견된 체모의 DNA 검사 결과와 비교하기 위해서다.
주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대단했다. 또 다른 노인은 "경찰이 주민 전체를 용의자로 보고 있더라"며 "빨리 범인을 잡아야지, 이래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쉬겠다"고 푸념했다.
농번기라 집에 사람이 없다는 노인들의 말에 논밭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곳에서도 주민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이모(75) 할아버지는 "그 집 사람들이 평소 이웃들과 왕래가 없던 터라 우리도 깜짝 놀랐다"며 "설마 우리 동네 사람이 그런 짓을 했을 리는 없다"고 말했다. 평화롭던 마을에 흉흉한 사고가 난 데 대해 "남사스럽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양이 다니던 비슬초교를 찾았다. 허양 집과 학교는 불과 20m 정도 떨어져 있다. 학교 옆에는 허양 살해범을 신고해달라는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교정 벤치에서 만난 권모(71·여)씨는 뒷산(용박골)에 가기가 무섭다고 했다. "아이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고사리철마다 고사리를 캐던 곳인데…, 이제 무서워서 어디 가겠어요? 저녁에 '마실' 나가기도 겁나요."
하교 시간이 되자 비슬초교에는 아이들이 부모 손에 끌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혼자 귀가하는 아이는 한명도 없었다. 한 학부모는 "번잡한 도시도 아니고 촌에서 아이를 등하교시킬 줄 몰랐다"며 "아이한테도 단단히 주의시키고 있다"고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허양 사건 수사본부가 마련된 달성경찰서 유가치안센터에는 이날 오후 경찰관 한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0여명의 경찰들은 다들 외근활동을 나갔다고 했다. "한번 만난 주민이라도 또다시 만납니다. 혹시라도 놓쳤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으니까요." 경찰이나 주민들 모두 하루빨리 얼굴 없는 살인마를 잡기를 바라고 있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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