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한줄로 읽는 한권

요즈음, 예전에 읽었던 독특한 삼국지 비평서 『소설이 아닌 삼국지』가 자꾸 떠오른다. 저자 최명은 청말 사상가 이종오의 이론을 소개하며 조조, 유비 등의 영웅들은 모두 '후흑(厚黑)의 대가'라 말한 적이 있다. 후흑이란 쉽게 말해 '포커페이스'다. 결국 '삼국시대'란 천하를 걸고 벌이는 구라꾼들의 노름판에 불과하단 것이다.

배짱이 없는 자들은 노름판에서 훈수나 두면서 살아가는 법이다. 그런데 한번씩 큰손들의 블러핑에 쫄지 않고 콜을 외치는 용기 있는 자들이 있다. 기세등등한 조조가 자신의 재사들과 용장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 대한 평을 부탁하자, 약관의 한 선비는 턱을 꼿꼿이 쳐들고 이렇게 대답한다.

"순욱은 조상이나 다니고, 순유는 무덤이나 지키고, 정욱은 관문이나 여닫고, 곽가는 글귀나 읊조리고, 장요는 북이나 치고, 허저는 마소나 먹이고, …… 우금은 담이나 쌓고, 서황은 개나 잡을 사람이오." 『소설이 아닌 삼국지』 최명 지음/조선일보사/471쪽.

물론 이러한 예형의 말은 침소봉대다. 아무리 꾀와 도끼를 팔아 개평이나 받아먹었다 해도, 곽봉효가 글이나 외울 시시한 모사는 아니며, 서황이 개나 잡을 졸장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이 통쾌한 이유는 예형이 시퍼런 권력의 형틀과 주리에 아랑곳없이, 청의와 백성의 푸르고 흰 목소리를 대신 질렀기 때문일 것이다. 예형의 독설은 계속된다. 뒤에 조조가 마침 "네 놈이 청백하면 나는 오탁하단 말이냐?"고 물어주니, 그는,

"그대는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을 구별하지 못하니 그것은 눈이 흐린 것이요, 시서를 읽지 않았으니 이는 입이 깨끗하지 못한 것이요, 충성스런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귀가 흐린 것이며, 예와 지금의 일에 아는 바가 적으니 몸이 흐린 것이라 할 수 있소." 『이문열 삼국지』 이문열 평역

이렇게 대답하며, 요긴하게 준비해온 조롱을 조조에게 안겨준다. 최명은 저서에서 그 의기만은 높게 사면서도, '지각이 있는 선비라면 혀를 조심해야 한다'며 예형의 경박한 일면을 꾸짖는다. 가장 읽기 좋은 삼국지를 평역해냈다는 문호 이문열 역시 예형의 야료를 '나약한 지성의 한계'라 꼬집으며 그의 무모함을 안타까워한다. 선생들의 염려대로 예형은 판돈도 없이 콜을 부르다 비명에 갔다. 말보다 총칼이 앞서는 난세라면, 자중하란 가르침이 분명 유효한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로그인 민주주의' 시대에는, 선생들의 우려가 약간은 노파심으로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의 예형은 일국의 고관대작들을 싸잡아 '불결한 팬티'라 놀리고도, 요절은커녕 멀쩡히 '겸임교수씩이나' 해먹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는 5천만원짜리 경비행기를 타고 노는 호사까지 누린다. 그래서 오리지널 예형의 죽음이 더 아까운 나로서는 이렇게 중얼거려 본다. "하늘이시여! 왜 예형을 낳고는, 왜 인터넷은 같이 낳지 않으셨나이까?"

박지형(자유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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