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기섭의 목요 시조산책] 봄, 마흔 지나/이태순

1

주홍빛 칠 벗겨진, 대문 틈새로 보인

그날 빈집 마당엔

봄빛이 가득했다

겨우내, 둘둘 감았던 머플러를 풀었다

2

신발만 놓인 봉당 아래 새똥 묻은 꽃, 피다 지고

바람 들고

비 젖어도

훅 끼친 아버지 발 냄새

가만히 발 넣어보다, 마흔은 벗어두고 왔다

마흔을 벗어두고 온 그곳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빈집. 주홍빛 칠 벗겨진 대문 틈새로 아닌 봄빛만 가득합니다. 선 채로 둘둘 감았던 머플러를 풉니다. 그러지 않으면 빈집의 봄빛이 금세 다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바람 들고 비에 젖기도 했을 옛집. 봉당에 신발 한 켤레 놓였습니다. 피다 진 꽃에 묻은 새똥이 유난히 희게 반짝입니다. 언제 벗어둔 지도 모를 신발에서 훅 끼치는, 아버지의 발 냄새. 아버지는 그렇게 오랜 날을 발 냄새로 남아 빈집을 붙들고 있었던 게지요.

아버지의 발 냄새 속에 가만히 발을 넣어 봅니다. 차라리 마흔 나이를 다 벗어 둔다면 사무친 세월이 좀 삭을까요. 속절없이 복받치는 발 냄새가 아버지의 부재를 증명합니다. 어디라 들러봐도 머리카락 한 올 쥐어볼 길 없는 완벽한 부재.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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