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나무

강화도의 마니산(摩尼山)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다섯 해 전 가을이었습니다. 마침 개천절 무렵이어서 참성단(塹星壇)을 개방하고 있었습니다. 단에 올라 엎드려 절도 드리고 눈 앞에 펼쳐진 서해 바다를 한동안 바라다 본 기억이 납니다. 내려오는 길은 정수사(淨水寺) 쪽을 택했습니다.

바위 능선을 지나 나무들 사잇길로 들어서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나무들의 존재가 느껴졌습니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가까운 길가에 또 저 안쪽 숲속에 나무들이 우뚝 우뚝 서 있었습니다. 올라갈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나무들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를 생각했습니다. 나를 돌아 보았습니다. 나는 너무 작았습니다. 나무는 너무 컸습니다. 나무를 닮고 싶었습니다. 나무로부터 배우고 싶었습니다. 마니산을 내려오며 시를 흉내낸 글 하나 지었습니다.

나무보다 키 크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면 얼마나 멀리 볼까// 나뭇가지보다 팔 짧은/ 사람들이/ 안으면 얼마나 안을까// 나무만큼도 못 사는/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알까// 아 나무는 큰사람인 줄/ 淨水寺 내려오는/ 林間之道에서 깨달았네

제가 사는 경주 동부동 집 뒤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나이가 자그마치 오백살도 넘었다고 합니다. 높이는 20m쯤 되고 둘레만도 7m에 가깝습니다. 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그야말로 거목(巨木)입니다. 지붕 위로 은행나무의 굵은 가지들이 뻗어 있습니다. 나무 아래에 집이 앉아 있는 모양이어서 집 이름을 그저 수하당(樹下堂)이라 짓고 삽니다.

새봄 은행나무 잎은 갓난아이 고사리손입니다. 요즘에는 예의 짙푸른 녹음을 자랑합니다. 가을 아침 해뜰 무렵에는 차라리 황금나무입니다. 노랗게 빛나거니와 바람 불면 노오란 비 내립니다. 무수한 은행들이 달렸다가 투둑투둑 떨어집니다. 줍지 않고 그냥 두면 겨울 지나 이듬해 봄 어린 자목(子木)들이 솟아납니다.

작년 시월 친구 부인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 어린 두 아들의 어머니였습니다. 금빛처럼 밝고 환한 이였습니다. 문상 다녀온 다음날 아침 수하당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짤막한 조문 하나 지어 붓으로 썼습니다.

樹下堂 은행잎들이 바람에 울었다/ 아직도 녹색인데/ 잎 끝만 조금 노래졌을 뿐인데/ 노오란 꽃비 내리긴 아직 이른데/ 잎이 졌다/ 잎이 떨어졌다/ 아 金잎이었다

올 초봄엔 월성(月城) 안팎의 버드나무들이 눈에 자꾸 들어와 마음 속으로 그리고 또 그려보곤 했습니다. 수하당에서 말입니다.

이영훈 국립 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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