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천민 복귀' 요구

수천 년간 엄격한 신분질서제도가 뿌리내린 인도에서 하리잔은 4계급으로 나누어진 카스트 체제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언필칭 不可觸 賤民(불가촉 천민),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손조차 대지 않으려는 부류다. 총인구 중 약 1억6천만 명으로 추정되며, 대대로 청소'세탁'이발'도살 등 가장 힘들고 더럽고 천대받는 일을 한다. 뼈빠지게 일하고도 일당 1달러 미만에 그칠 만큼 가난과 멸시를 숙명처럼 껴안고 산다.

요즘은 조금 달라졌지만 과거엔 불가촉 천민이 외출할 때는 진흙컵을 턱 밑에 걸고 다녀야 했다 한다. 그들의 침으로 대지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빗자루를 허리춤에 매달고 다녀야 했는데 신분이 높은 카스트와 마주칠 때 자신들의 발자국과 그림자 때문에 더럽혀진 땅을 깨끗하게 쓸어야 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들은 같은 우물의 물도 함께 마실 수 없다. 오죽하면 신조차 버린 사람들이라 할까.

지난달 하순부터 인도 곳곳에선 구자르 부족이 주요 고속도로와 철도를 점거한 채 시위를 벌였다. 군경과의 충돌에서 40여 명이 죽고 70여 명이 부상하는 유혈 폭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는 참으로 엉뚱했다. 자신들을 불가촉 천민으로 신분을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간디가 가진 생애 총 11차례의 장기 단식 중 두 번이 인간 대접 못 받는 불가촉 천민의 지위 향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천하디 천한 부류에 속하겠다며 죽음을 불사한 시위까지 하다니!

인도 정부가 최하층민에게 부여한 우대 정책 때문이었다. 가난의 질곡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그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기 위해 공직 채용과 대학 신입생 선발 등에서 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는 것. 그런데 하층계급 바이샤에 속하는 구자르족은 자신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다며 할당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 신분 강등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라자스탄 주 정부는 이달 18일 손을 들었다. 구자르족은 불가촉 천민 계급 쟁취(?)의 소원을 이룸으로써 공무원 채용과 대학 신입생 선발 등에서 5%의 정원을 할당받게 됐다. 공부도, 사회적 성공도 꿈꾸기 힘든 사람들이 대대로 최하층민으로 살아갈 것을 각오하고 비장하게 선택한 '슬픈 카드'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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