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상도식 말 비틀기 '야지'

질투의 빈정거림인가 애정어린 반어법인가

칭찬은 쑥스럽고 비난은 부담스럽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둘러 말하기를 좋아한다. 서로 충분히 친밀하고 분위기도 좋다면 약간은 비아냥거리는 칭찬이나 비꼬는 비난, 즉 '야지'를 놓는 것에 너그러이 대처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한꺼풀 덮어버리고 내뱉는 '야지'. '냉소적인 격려 또는 우호적 비판'으로 불리는 '야지'가 오가는 문화를 들여다보자.

◆ 야지, 그 모호한 경계성

먼저 독자들의 양해부터 구하고자 한다. 일본에서 유래된 야지라는 말을 언론에서 쓰기가 부적절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취재팀은 야지에 해당하는 우리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사전적 의미에서 '야지'라는 말은 '야유' '조롱'과 비슷할 수 있지만 실생활에서 용도는 엄연히 다르다. 뉘앙스에 차이가 있는 셈이다. 대체할 우리말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야지란 표현을 썼다.

지역업체 중견 간부인 권모(40)씨. 얼마 전 회식자리에서 입사 동기들과 대판 싸움이 날 뻔했다. 최근 인사이동에서 핵심부서 팀장을 맡게 된 그에게 한 동기가 이렇게 말했다. "역시 권○○야. 죽어라고 일만 하더니 드디어 좋은 자리 하나 차지했네. 열심히 해라. 부장도 되고, 이사도 돼야지. 그나저나 그쪽 팀원들은 죽었다고 복창해야겠다." 부러움 반, 칭찬 반으로 던진 말이지만 가뜩이나 이번 인사에서 눈에 띄는 발탁이 된 탓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권씨에게는 그다지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열심히 하라고 격려는 못 해줄 망정 왜 야지를 놓고 그래? 내 자리 못 가서 아니꼽냐?"

웃자고 던진 말인데 불의의 한방을 맞은 동기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날을 세워 답하고 말았다. "아니, 켕기는 게 있냐? 그동안 열심히 했고, 앞으로도 잘하라는 뜻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팀장 되니까 동기는 눈에도 안 들어오냐?"

물론 둘은 이튿날 속풀이 해장 점심을 함께하며 오해를 풀었다. 동기 왈, "그냥 잘했다고 칭찬하고 앞으로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려니까 조금 낯 뜨겁고 쑥스러워서 해 본 말이야." 권씨 역시 "평소 같으면 그냥 야지 놓는가보다 했을 텐데…. 나 역시 동기들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는데 이번 인사에서 공연히 주목받고 나니까 놀리는 걸로 들렸나보다. 함부로 말해서 정말 미안해."

◆칭찬은 적극적으로 하라

'야지'는 아는 사람끼리 통용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종의 '냉소적인 격려'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자~알 해봐라'식의 빈정거림과도 다르다.

직장인 김성호(37)씨는 이른바 '야지 문화'가 마뜩찮다고 말한다. "야지는 경상도 사람의 기질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직선적이기보다 감정을 에둘러 표현하는. 그냥 '부럽다'거나 '열심히 해라'라고 말하면 될 것을 굳이 '좋은 거 하나 건지나 보네' 또는 '이번엔 제대로 되겠네'라며 감정을 포장하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습니다."

'야지'라는 표현은 다른 지역에서도 사용될까? 서울에서 나고 자란 황상훈(38)씨는 "대학시절까지 '야지를 놓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 대구에 와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접하게 됐다"며 "이 표현의 미묘한 뉘앙스 때문에 같은 뜻의 서울말을 찾기 힘들다"고 했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송선희(30)씨도 "태어나서 한번도 듣지 못한 용어고, 서울에 있는 경상도 사람들도 거의 안 쓰는 것 같다"고 했다.

쓰임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굳이 야지를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대학생 조중근(23)씨는 "요즘 세대는 별로 쓰지 않는 말"이라며 "만약 비슷한 상황이라면 '놀리지 마라', '부러우냐'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서지영(30) 대리는 "여자들은 '야지를 놓다'라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 편이고, 간혹 남자들이 쓰는 경우를 보지만 사실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며 "대화의 행간을 읽어보면 빈정거리면서 칭찬하거나 격려하기 또는 조심스레 비판하기라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야유나 조롱, 조소와 같은 문어체적인 의미와도 사뭇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는 반응이다.

생산업체 관리직에 근무하는 최모(46) 차장은 에둘러 칭찬한 탓에 곤란한 경험을 한 적도 있다. 일이 서툴던 부하 직원이 오랜 만에 손 한번 댈 필요없는 깔끔한 보고서를 올렸다. 최 차장은 "이렇게 잘할 수 있는 걸 지금껏 나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지? 옛날처럼 보고서 만들면 앞으로는 던져버린다"고 말했다. 칭찬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 부하 직원은 술자리에서 "왜 저만 그렇게 미워합니까? 일을 잘해도 나무라시고…"라며 원망을 했다. 다른 직원들이 보는 데서 드러내놓고 칭찬하기가 겸연쩍어서 약간 장난스런 투로 칭찬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던 최 차장은 이런 반응에 깜짝 놀랐다. 사실 부하 직원도 당시 웃어넘기면 될 일이었지만 가뜩이나 꾸중 들을까봐 위축돼 있던 탓에 역효과가 난 것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비꼬는 투의 비난은 더 나쁘다

중학교 교사 이영주(35)씨는 학생들에게 한마디 할 때마다 조심스럽다고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동 수업을 위해 특별교실로 갔는데 학생들이 복도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유인즉, 반장이 아침 일찍 미리 받아두었던 특별교실 열쇠를 그만 잃어버린 것. 학교를 온통 뒤지다시피 난리법석이 난 뒤에 여벌의 열쇠를 찾아서 겨우 수업을 할 수 있었다. 화가 난 이씨는 사과하는 반장에게 "네가 제대로 하는게 뭐 있냐? 한두번 있는 일도 아닌데 됐어"라며 고함쳤다. 그저 "괜찮다. 다음부터 주의하자"고 말하면 될 것을 감정을 못 참고 비아냥거린 셈이 됐다. 이후 반 아이들이 그를 보는 눈길이 달라졌다. 심부름을 시키면 "저도 제대로 못하는데요"라며 입을 삐죽거리기 일쑤였다. 며칠 뒤 조회시간에 비꼬는 투로 나무라서 미안하다고 말한 뒤에야 비로소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학부모 박민희(42)씨는 꾸중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화가 났다고 해서 꾸중하는 것은 화풀이밖에 안 됩니다. 숙제를 안 했거나 준비물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 때 일단 감정을 진정시킨 뒤 잘못한 부분만 지적해줘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제발 좀 똑바로 해'라던가 '언제쯤 네가 제대로 할래'라고 나무라는 것은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도 없이 아이의 감정만 그르치게 됩니다."

중소기업에서 3년째 일하는 윤모(29)씨는 과거 잘못까지 한꺼번에 끄집어내서 비아냥거리듯 나무라는 것이 가장 참기 힘들다고 했다. 입사 첫해 전화로 주문량을 잘못 받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던 윤씨는 이후 사소한 잘못만 해도 "아이구, 윤 선생님 이번에도 한건 하셨네요. 이제는 일하는 모습이 아슬아슬한 게 스릴 있습니다"라며 놀리는 부장 때문에 미칠 지경이라고 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국립국어원에 있는 사전에 야지가 등재돼 있기는 하지만 표준어는 아니며 '야유로 순화해서 써야 함'이라고 적혀있다"며 "특별히 한 단어나 관용어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뜻을 말하기는 곤란하며, 일본어에서 유래한 단어인 만큼 이것 자체를 공식적 문서나 일상어로 쓰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말했다.

▨ 야지?=일본어에서 유래했다. 흔히 '야지를 놓다'라고 쓴다. 야지는 에도시대에 생긴 말로 '오야지우마(ぉやじ馬)'에서 오(ぉ)가 떨어져 나간 말이다. '오야지우마'는 늙은 말이라는 뜻이며, 젊은 말의 엉덩이에 달라붙어 걷고만 있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다른 사람 뒤에 붙어서 영문도 모른 채 떠들어대는 구경꾼을 '야지우마'라고 부르게 됐다고. 야지우마가 줄어서 '야지'(やじ)가 됐고, 이것이 동사처럼 쓰여서 '야지루'(やじる), 즉 '야유하다, 놀리다'라는 뜻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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