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댁, 모내기철이라 많이 바쁜가봐. 얼굴 좀 보여줘요."
청도 각남면 일곡리 이길자(59) 이장은 이 마을에서 만큼은 유명 연예인도 울고 갈 만큼 인기가 최고다. 그도 그럴 것이 밤마다 마을회관에 모이는 할머니들이 이장 얼굴이 하루 이틀 안 보인다 싶으면 서로 전화통을 붙들고 불러내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누가 묻지 않아도 "우리 이장은 딸 노릇이며, 며느리 노릇에 해결사 역할까지 잘하고 있다"며 침이 마르도록 치켜세운다.
일곡리는 4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 농사를 짓는 순박한 마을로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시골의 작은 마을이 그렇듯 이곳도 내밀하게 잘 아는 사이인데다 똘똘 뭉쳐 살며 서로 의지하고 위안을 주고 받는다. 이런 할머니들의 또 다른 기댈 언덕, 믿고 의지할 사람이 바로 마을 이장이다.
"혼자되신 할머니들이 늘어나면서 내가 이장으로 할 일이 있겠다 싶었어요. 주민들이 추천한다고 겁도 없이 이장직을 선뜻 받아들였죠." 2003년부터 이장직을 맡은 이씨는 부녀회와 힘을 모아 국수 한 그릇이라도 정성스레 대접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특히 할머니들의 집에 전깃불이 나가도, TV에 문제가 있어도 연락이 오는 즉시 척척 해결해줘야 마음이 놓인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남자 이장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꼼꼼하고 섬세한 여성 이장만의 장점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씨는 그의 입버릇처럼 '봉사하며 재미나게 산다'는 신념을 갖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고 회상한다. 부산이 고향인 이씨는 남편 최영진(60)씨를 만나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30대 중반쯤에 시골로 내려왔다고 기억한다.
"사실 시골을 전혀 몰랐죠. 그저 밥해먹고 살면 된다 생각했어요." 이씨가 처음 청도로 왔을 때는 논 2천㎡이 전부였다고. 그러나 지금은 논 2만6천㎡, 밭 6천600㎡, 소 15마리 사육 등 두 부부가 해내기에는 농사가 만만찮은 규모다.
부추와 잡초조자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수룩했던 부산 새댁이 이제는 농사일이며, 마을일이며 뭐든지 열성적으로 척척 해내는 이장이 되었다며 겸연쩍어 한다. 주민들은 "우리 이장은 일을 딱딱 끊어서 잘 처리한다"고 입을 모은다.
무슨 일을 하든 중심을 잡고 기관에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또 반드시 책임을 지는 점이 장점이라고. 부녀회장으로 일할 때도 그랬고, 이장으로 있는 지금도 그렇다. 문제가 있으면 주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난 다음 이야기를 매듭지어가는 것이 주민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는 것. 예전 각남여성농악단장으로 단원들의 갈등을 풀고 이끌어가는 리더십은 지금도 본받을 만하다고 자랑한다.
이씨의 요즘 고민은 군에서 여성 이장마을에 인센티브로 내려 보내기로 한 사업비 3천만원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동민 회의에서 충분히 논의를 해야겠죠. 마을 집수정도 오래됐고, 물탱크도 교체해야겠고, 할머니들을 위해 운동기구도 들여놓고 싶고…." 이씨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어떻게든 노인들과 마을을 위한 곳에 썼으면 하는 바람은 하나이다.
"주민들이 이장직을 장기 집권해도 좋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도 될까요?" 바쁜 집안 농사일에도 동네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이씨는 주민들이 필요한 부분은 직접 배워서라도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다.
"여성 이장들은 특유의 섬세함과 친화력으로 궂은 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그것도 재미나게요." 이씨는 다른 마을에서도 여성 이장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며,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어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활짝 웃는다.
청도·노진규기자 jgro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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