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중·경기고·서울대 상대졸업. 김태겸(56) 전국시도지사협의회 사무총장은 이른바 'SK출신'으로 30년 공직생활 동안 잘나가는 공무원이었다.
김대중 정부 초기에는 행정혁신단장으로 정부혁신작업을 진두지휘했고 자신의 정부개혁에 대한 생각을 담은 '신정부혁신론'을 출간, 학계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또 공무원연금관리공단 등 공기업 구조조정에 나섰을 때는 "개혁은 따뜻한 마음으로 추상 같은 원칙에 따라 실천해야 한다"는 평소 소신에 따라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도 했다. 지난 2004년 강원부지사를 끝으로 공직을 떠난 후 다시 2006년 11월 전국시도지사협의회 사무총장을 맡아 '지방분권의 전도사'로 변신했다.
서울시청 별관에 자리 잡고 있는 전국시도지사협의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김 총장은 의성군 점곡이 고향이나 부친이 안동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서 태어난 곳은 안동이다. 그 뒤 부친이 세무공무원으로 전직하면서 서울로 가는 바람에 네살 때 상경, '서울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는 어릴 적 고향생각은 거의 나지 않는다면서도 "요즘도 자주 의성에 간다. 앞으로도 고향에서 할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선가 행정고시(15회)에 합격하고 수습교육을 받을 때 그는 의성군청 근무를 자원했다고 한다. 어릴 때 떠난 의성과의 인연을 찾아나선 셈이다.
1974년 6개월간 의성군청에서 근무한 데 이어 두달여간 경북도청으로 옮겨서 일하기도 했다. 그때 자신을 비롯한 초임 공무원들에게 밥을 사주고 보살펴주던 선배가 조해녕 전 대구시장이었다. 행정자치부에서 국장으로 승진한 후 행정부지사로 부임해야 할 2000년 초반, 그는 고향인 경북에서 일할 기회를 찾았지만 박명재 부지사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원도 부지사를 맡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진선 강원도지사가 절친한 행시 동기였다는 점이 그의 선택을 크게 좌우했다. 김 지사와 함께 일했던 당시 인연으로 그는 김 지사가 2006년 제3대 전국시도지사협의회장을 맡자 사무총장으로 일하게 됐다.
그가 공직을 그만둔 것은 참여정부 때다. 남해군수 출신의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이 취임하면서 그는 한직으로 밀렸다. 소청심사위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공무원생활을 접었다.
그는 전국시도지사협의회의 성격에 대해 "중앙정부에 대응해서 지방정부의 이익을 옹호하는 로비스트"라는 정의를 내리고 막강한 중앙정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지방정부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999년 1월 고건 전 서울시장을 초대 협의회장으로 전국시도지사협의회가 설립됐고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2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프랑스공화국의 조직은 지방분권체제로 구성된다'는 프랑스 헌법 제1조를 예로 들면서 우리나라도 지방분권형 국가를 선언하거나 최상위법인 헌법에 실질적인 지방자치의 보장근거를 마련하는 개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도지사협의회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어느새 지방분권론자가 됐다. 국가와 지방사무 간 배분원칙과 기준을 설정하고 입법과정에 지방정부의 참여제도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무총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그는 공식적인 직함으로 현안에 대한 입장차이나 갈등조정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평소 갖고 있던 관계를 통해 대부분 해결되고 있다고 말했다. 16개 시도지사 대부분이 그가 총무처와 행정자치부, 기획예산처 등에 근무하면서 이런 저런 인연을 맺은 사이이기 때문이란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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