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뒤'를 살립시다

이영훈(국립경주박물관장)
이영훈(국립경주박물관장)

몇 달 전 대구의 어느 모임에서 한 분으로부터 '흰자질'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말이었습니다. 반갑기 짝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저보다 젊은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니 '흰자질'이란 낱말을 아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단백질과 같은 말이라고 하니 그제야 알아들으며 그런 말도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조차도 '흰자질'은 단백질에 밀려나 있습니다. '흰자질'을 찾아 보면 아무런 풀이도 없이 단백질과 같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뜻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단백질을 찾아가야 합니다.

'흰자질'처럼 죽은말이 될 위기에 처한 말들이 여럿 있습니다만, 그 대표적인 보기로서 '뒤'를 꼽고 싶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뒤'라는 말은 그야말로 뒤로 밀려 버렸습니다. 대신 '후'(後)가 '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뒤'를 밀치고 당당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 뒤'보다 '그 후', '며칠 뒤'보다 '며칠 후', '먹은 뒤'보다 '먹은 후', '헤어진 뒤'보다 '헤어진 후', '앞뒤'보다는 '전후'라고 쓰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매일신문 지면에도 '마감 후'라는 칼럼이 있습니다.

이처럼 요즈음에는 순수 우리말보다 한자말을 즐겨 쓰는 흐름이 있는 듯합니다. 물론 단백질도 그리고 '후'도 국어입니다만, 한자말만을 쓰면 그 뜻을 알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또한 강팀보다는 약팀을 응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듯, 죽어가는 말 쪽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됩니다. 가려 먹지 말고 골고루 먹자고 하듯이 '후'만 쓰지 말고 '뒤'도 썼으면 합니다. 신문 방송 등 언론이 앞장서 죽어가는 아름다운 우리말들을 살려내었으면 합니다. 지면에서 그러한 말들을 자주 만나고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십여 년 전 '나시는 벗고 민소매를 입자'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한 신문에 쓴 적이 있습니다. '나시'라는 일본말 찌꺼기를 버리고 우리말인 '민소매'를 쓰자는 제안이었습니다.(그 무렵 국어사전에는 '민소매'라는 낱말이 실려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는 흔히 문화의 다양성을 강조합니다. 예컨대 지구상에서 사라져 가는 소수 민족의 언어들을 지켜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말과 글에서의 약육강식을 우려합니다. 우리 말과 글의 다양성도 존중되어야 한다면, '후'만 사랑하지 말고 '뒤'도 사랑해 주길 호소합니다. 가끔은 '뒤'를 앞세우면 좋겠습니다. 하여 작은 소리로 외칩니다. '뒤'를 살립시다!

이영훈 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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