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중에서 가장 으뜸은 위스키로 빨리 취하고 쉽게 깬다. 위스키는 1~2잔 정도는 안주 없이도 마실 수 있다. 꼬냑이 여성적인 술이라면 위스키는 강렬한 남성의 술이다.
위스키는 열대지방에서는 더위를 식혀주는 청량제, 추운지방에서는 추위를 덜어주는 방한제 역할을 한다. 위스키는 맥아와 보리·밀·옥수수 등 곡류를 발효시켜 증류한 술로 기본적인 제조방법은 원료를 당화시켜 효모를 섞어 발효시킨 다음 몇 차례 증류를 반복, 오크통에 담아 최소한 3년 이상 숙성시킨 것이다.
12세기 초 십자군전쟁에 참가했던 가톨릭 수사들이 아랍의 연금술사들로부터 증류주의 비법을 전수해 고향으로 돌아왔고, 알코올 증류법은 순식간에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갔다. 위스키가 언제부터 만들어 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1171년 잉글랜드의 헨리2세가 아일랜드를 침공했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이 '아스보'라는 강렬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제1차(1095~1099년) 또는 제2차(1144년) 십자군전쟁에 참여 했던 가톨릭 수사들이 아랍의 연금술사들에게 배운 증류비법으로 '아스보'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94년 위스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있지만 그 이전부터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지방에서 양조기술이 성행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대부분 술이 그렇듯이 새로운 증류주도 15세기까지는 가톨릭 수사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다가 1534년 헨리8세의 이혼문제로 가톨릭교회를 폐쇄함에 따라 민간인들에 의해 위스키가 만들어졌다. 그후 18세기 초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1세가 잉글랜드 국왕을 겸임하면서 대영제국(United Kingdom)이 탄생했다.
고대 유럽대륙의 주인이었던 켈트(Celt)인들의 우스퀴보(Usquebaugh, 생명의 물)가 아일랜드에 전해졌고, 1170년 헨리 2세의 잉글랜드 정복에 의해 스코틀랜드에도 전해져 15세기에는 고지대인 하이랜드(Highland)에서 위스키가 제조되기 시작했다. 결과 위스키는 아일랜드의 아이리시(Irish) 위스키와 스코틀랜드의 스카치(Scotch) 위스키로 나눠지게 됐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위스키의 원형은 12세기경에 만들어진 것.
1660년 1갤런당 2펜스의 세금이 매겨진 이래 스카치 위스키는 밀조자와 징세관의 숨박꼭질 속에서 발전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합병으로 대영제국이 탄생한 후 대영제국 정부가 재원 확보를 위해 종전보다 높은 세금을 부과하자 스코틀랜드 증류업자들이 하이랜드의 산속으로 숨어들어 위스키를 밀조했다. 내전이 끊임없던 스코틀랜드에서 장기 저장할 목적으로 창고에 감춰 훈증한 밀을 원료로 만든 위스키가 특유의 향을 나타내면서 위스키가 탄생했다. 이처럼 스카치 위스키는 15세기 무색투명한 증류주(소주)에서 18세기 말부터 지금과 같은 호박색이 됐다.
위스키 밀조자들은 맥아 건조에 이탄(泥炭,peat)을 사용했다. 이같은 건조방법이 훈연취(熏煙臭)가 있는 맥아를 사용, 스카치 위스키를 만든 시초다. 또 증류한 술을 은폐하려고 셰리주(sherry)의 빈통에 담아 산속에 은폐시켰는데 나중에 통을 열어 보았더니 증류 당시에는 무색이었던 술이 투명한 호박색에 짙은 향취가 풍기는 술로 변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목통 저장의 출발점이다. 이렇듯 밀조자들이 궁여지책으로 강구한 수단들이 위스키의 주질 향상을 초래하는 등 위스키의 역사는 우연에 의해서 이뤄졌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럽대륙의 포도가 휘로키세라충에 의해 전멸돼 당시 명성을 떨치던 코냑(Cognac) 제조가 불가능해진 틈을 타 듀워(Dewar)·워커(Walker) 등 가문의 노력으로 스카치 위스키는 세계적인 술로 발돋움하게 됐다. 신영휴(금복주 전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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