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고급 아파트촌에서다. 이웃사촌끼리 대화하던 중 한 여성이 자신이 졸업한 지방의 명문 중고등학교 얘기를 했다. 그러자 좌중의 한 사람이 자신도 그 학교를 나왔다며 반가운 표정으로 대학은 어딜 나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금방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엘 못갔어요"라고 털어놓았다. 경제적으로는 윤택해졌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엔 치유하기 힘든 설움이 뿌리깊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배고픈 설움만큼 견디기 힘든 설움도 없다 한다. 하지만 '가방끈'이 짧은 사람에겐 못 배웠다는 설움만큼 큰 설움도 없다. 특히나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씨'인 사람에겐 '까막눈'이라는 사실이 주홍글씨처럼 평생 따라다니기도 한다.
"글 못 읽는 사람이 요즘 어디 있을라구"들 말한다. 대학진학률이 2007년 기준 82.3%로 세계 최고 수준이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곳곳에 개설된 한글교실에서 '가갸거겨'부터 배우는 성인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60대 이상 노년층이야 가난했던 시절 탓이라 하겠지만 20, 30대 청년, 40, 50대 중장년층 중에도 문맹이 적지 않다.
게다가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약의 사용법이나 각종 문서 등을 읽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실질 문맹자'가 많다. 2001년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관련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들의 문서 문해 실력은 OECD 조사 대상 22개국 중 18위에 불과하다. 중'고교생들의 국어 실력이나 기업체 입사 시험에 나타난 신입사원들의 국어 실력도 갈수록 떨어진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우리말의 70%가 한자 조합으로 이뤄졌음에도 학교에서 한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영어 광풍 속에 국어가 밀려나는 현실이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성인 월평균 독서량이 1권이고 4명 중 한 명꼴로 일 년 내내 책과는 담을 쌓는 풍조 역시 형편없는 국어실력의 주범이다.
국립국어원이 이달 중순 전국의 성인 7천 명을 대상으로 문맹률 조사를 시행한다고 한다. 1970년 통계청의 조사 이래 38년 만이다. 이번엔 국어 이해력, 문장 독해력 등 전반적인 국어 실력까지 조사한다고 한다. 세계가 인정하는 한글의 우수성도 우리가 갈고 닦지 않으면 버려져 짓밟히는 진주나 다름없게 되지 않을까.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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