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던가. 하지만 살면서 정말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될까? 미리 준비하고 조심하면 어지간한 일들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거부할 수도, 미룰 수도 없고 언제 다가올 지도 모르는 그것,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거대한 벽이다. 그 거대한 벽이 코앞에 다가설 때까지, 갑작스런 등장에 너무 놀라 입만 벌린 채 생각조차 마비되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아무도 모른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벽의 존재는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잊고 살 뿐이다.
일상에서 늘 죽음을 떠올리며 산다는 것은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다. 그래서 죽음과의 '즐거운 동거'가 필요한 것이고, 그 벽이 다가오기 전에 원 없이 세상을 살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미국 영화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에서 죽음의 벽을 깨달은 두 노인이 생의 마지막 화려한 불꽃을 태우는 것처럼. '버킷 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하고픈 목록을 말한다.
◆우리 삶의 버킷 리스트
취재 중에 만난 사람들에게 버킷 리스트를 물었을 때 반응은 딱 두 가지였다. 대답은 "없다"로 똑같았다. 하지만 한 부류의 사람들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지금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으니) 그런 목록 따위는 필요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극히 예외적이지만 물음을 받자마자 마치 준비된 원고를 읽듯 목록을 줄줄 쏟아내는 사람도 있었다.
직장인 최현수(45)씨는 "그런 것을 미리 생각해 두는 사람이 많아요?"라고 오히려 되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뒤 "원없이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버킷 리스트를 답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우선 순위에 꼽았다. 아울러 그 여행에는 흔히 가는 동남아, 유럽, 미국이 아니라 히말라야, 러시아 대륙 횡단, 아프리카 오지, 남극점과 북극점, 남미의 잉카와 마야 유적지를 꼽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대답도 많았다.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양모(48)씨는 "사람과 부대끼지 않는 곳이면 어디든 좋다"며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든지 조용한 시골마을로 가고 싶다"고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서도 희망사항은 달랐다. 대학 도서관에서 만난 이준욱(25)씨는 "올봄에 졸업했는데 아직 취업을 못했다"며 "죽기 전까지는 모르겠고, 그저 꼬박꼬박 월급 봉투 받아보고 퇴직금까지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부 박모(42)씨는 "속물이라고 욕할지 모르지만 죽기 전에 원없이 돈을 써봤으면 좋겠다"며 "가족들과 근사한 외식도 마음 놓고 하고, 일년에 한번쯤 해외여행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실현 가능성을 떠나 다소 황당한 희망을 피력하는 사람도 있었다. 직장인 황모(39)씨는 "열기구를 타고 세계 일주를 떠나고 싶다"고 했고, 자영업을 하는 한모(44)씨는 "마치 슈퍼맨처럼 초능력을 지닐 수 있다면 억울하고 힘 없는 사람을 위해 싸우고 싶다"고 했고, 고교생 김대석(18)군은 "잠자면서 꿈 속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시골의사 박경철의 목록
투자분석가로 유명한 '시골의사' 박경철씨에게 전화를 걸어 버킷 리스트를 물었을 때 그는 잠시 머뭇거림도 없이 5가지 목록을 읊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가 인터넷 블로그에 남긴 '삶과 죽음사이'라는 글을 읽고, 나름대로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보았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글에서 박경철은 췌장암 환자였다. '최근 두 달은 꽤 길고 힘든 기간이었다'고 시작하는 글 속에서 어느 날 그는 복부 통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위염쯤으로 생각하고 나름대로 약을 처방해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자 길어야 6개월 생명이 남은 췌장암으로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눈물을 흘리며 남겨진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고,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 등 남겨진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회의 중 복통으로 쓰러진 그는 처남이 근무하는 경기도 모 병원에서 정밀진단을 받았다. 결과는 위염과 췌장염. 다소 어처구니없는 그 순간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고, 사방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비록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잠시나마 죽음을 준비했던 박경철씨는 진심어린 버킷 리스트를 들려주었다. 첫째, 콘크리트 없는 동네 여행하기. 그는 "콘크리트 산업·문명에 둘러싸여 머리와 사고구조가 굳어져 버렸다"며 "티베트나 히말라야,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면서 굳어진 뇌를 물풀처럼 부드럽게 풀어보고 싶다"고 했다. 둘째, 잘못한 일을 담은 책 쓰기.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책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서 잘못했던 일들만을 적은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 '반면교사'용으로 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셋째, 선방(禪房)에서 수행하기. 종교적 이유는 아니고, 일본이나 미얀마 등지의 선방에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벌이고 싶다고 했다. 넷째, 농사 짓기. 시골의사는 그동안 만든 부가가치는 현대문명의 도구를 통해 일군 것이며, 성과는 볼품없고 빈약하겠지만 농사를 통해 진실한 노동의 의미를 체험하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아내하고만 1, 2년간 지내기. 그는 "여행도 좋고 방에만 둘이 있어도 좋다"며 "아내와 1, 2년간 둘이서 지내면서 이해했던 점, 오해했던 일, 섭섭한 것을 돌아보고 함께한 시간을 반추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대구의료원 호스피스병동 김여환 박사
대구의료원은 최근 호스피스병동 '평온관'을 열었다. 말기 암 환자 등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보다 평온하게 삶을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 이곳 책임자인 김여환 박사는 누구보다 죽음을 자주 접한다. 84학번인 그는 올해 44세다. 하지만 39세에 인턴 생활을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아줌마로 살다가 '죽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다시 의사 공부를 했다. 그는 지난 3월부터 매주 국립암센터를 찾아가 호스피스 고위과정을 듣고 있다. 죽음이 두려워서 호스피스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 그 두려움을 극복할 것으로 믿었단다. "우리 모두 죽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죽음에서 소외돼 있습니다. 너무 자연스런 과정인데 죽음을 터부시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가 고등학생인데, 옛날엔 무척 많이 싸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저 열심히 먹이고 뒷바라지하고. 그래도 3년 뒤에 대학에 가면 제 품을 떠납니다. 무엇 때문에 아웅다웅해야 하나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보면 바로 내일 죽음이 와도 별로 달라질 게 없어요. 누구나 바로 등 뒤에 죽음이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평온관이 문을 연 뒤 찾아온 첫 환자는 담관암을 앓고 있는 할머니였다. 통증을 측정하는 바스(VAS) 지수가 무려 7, 8에 이르는 말기 상태. 출산의 고통은 '5' 정도이며, 대개 통증이 '5' 이상이면 모르핀을 쓰기 시작한다. 평생을 참고 인내하며 살아왔던 할머니는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지내왔다. 피부에 고름이 새어나오면서 누공이 생기자 놀라서 병원으로 왔다. 병동에서 쓸 수 있는 마약을 써서 간신히 통증을 '3' 정도로 잡았다. 할머니는 "마치 가시 창살에 갇혀있다가 나온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 할머니의 삶도 며칠 남지 않았다. 김여환 박사는 "내게 버킷 리스트는 없다"며 "적어도 오늘 하루 할머니를 살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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