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놈은 희한하다.
매우 정확할 듯하지만, 사실은 제멋대로다. 왜곡도 하고, 스스로 없애기도 하고, 또 변형되기도 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처럼, 또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처럼 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르게 기억되곤 한다.
그래도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특히 사랑했던 기억은 더하다. 한때 모든 것을 바쳤던 그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사랑했던 나조차도… .
이재한 감독의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와 그런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남자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다.
수진(손예진)은 유달리 건망증이 심하다. 편의점에 가서 산 물건과 지갑까지 놓고 나오기 일쑤다.
철수(정우성)와 만나는 도입부는 이 영화의 방향을 잘 보여준다. 수진이는 이날도 어김없이 산 콜라와 지갑을 놓고 나온다. 다시 편의점에 들어선 순간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손엔 콜라가 들려 있고, 콜라가 있어야 할 편의점 카운터는 비어있다. 허름한 옷에 부랑자처럼 생긴 사내. 그 콜라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수진은 콜라를 뺏어 단숨에 들이켠다. 그리고 빈 캔을 돌려주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그 남자가 철수다. 그러나 콜라는 그 남자의 것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지만, 이미 늦었다.
콜라를 마시고 '꺼억~' 트림하는 모습이 여간 사랑스럽지 않다. 이렇게 사랑스런 여인이 곧 알츠하이머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도입부다.
그러나 곧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철수가 수진의 콜라를 뺏어 마시고는 트림을 한다. 그리고 결혼에 골인한다. 신혼의 달콤함도 잠시뿐, 수진의 건망증은 점점 심해간다. 남편의 도시락에 반찬은 없이 밥만 두 개 싸주는가 하면, 집조차 찾기 어렵다.
병원에서 수진은 자신의 뇌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진은 철수에게 말한다. '내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대….'
일본 니혼TV 드라마 '퓨어 소울(pure soul)'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젊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상투적이고 뻔한 스토리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몇몇 장면의 영상미는 빼어나다.
수진과 철수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 키스하는 장면은 손예진만큼이나 예쁜 장면이다.
어느 날 저녁, 포장마차에 나란히 앉은 수진과 철수.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 "안 마시면?" "볼일 없는 거지, 죽을 때까지." 동시에 잔을 들어 소주를 입에 털어 넣는 수진과 철수.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둘은 키스하고, 페이드 아웃된다.
이 영화는 역대 일본 최고 수출가인 270만달러에 판매됐다. 2005년 10월 일본 전역에 개봉되어 첫주 전국 308개 극장에서 2억3천만엔으로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이는 역대 일본에서 개봉한 한국영화 중 '쉬리'(2000년)에 이어 두번째 일본 박스오피스 1위 기록이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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