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이중환의 당쟁론

"현명한 사람이냐 어리석은 사람이냐, 혹은 그 인품이 높으냐 아니냐의 평가도 오직 자기 당의 색깔(黨色)만을 기준으로 내리기 때문에 다른 당파에는 통하지 않는다……하늘에 가득 찰만한 죄를 범한 자라도 다른 당파의 탄핵을 받으면 是非曲直(시비곡직)은 따질 것도 없이 떼거리로 일어나서 그 사람이 옳다고 변호한다."

현재의 한국 정당 정치의 모습을 묘사한 것 같은 이 글귀는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의 사람인 靑潭(청담) 李重煥(이중환:1690~1756)이 '擇里志(택리지)'에서 한 말이다. 이중환은 당쟁의 희생자였다. 少論(소론)에 속했던 이중환은 24세 때인 숙종 39년(1713) 과거에 급제해 경종 때 金泉察訪(김천찰방)과 병조정랑 등을 역임했으나 경종이 재위 4년(1724)만에 독살 혐의 끝에 사망하고 老論(노론)의 지지를 받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큰 시련에 처하게 된다. 경종 2년(1722) 地官(지관) 출신 睦虎龍(목호룡)이 노론에서 경종을 독살하려 했다고 고변해 노론 주요 대신들이 사형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이 이 사건 재수사를 요구했다. 노론에서는 경종 2년 김천찰방으로 있던 이중환이 목호룡을 배후 조종했다고 의심했으나 이중환은 鞠問(국문)에서 6度(도), 즉 180대나 되는 혹독한 訊杖(신장)을 견디며 일관되게 부인했다. 유일한 물증은 이중환이 김천역의 驛馬(역마)를 목호룡에게 빌려주었다는 것이었으나 이중환은 빌려준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것이라고 증언해 영조 2년(1726) 겨우 목숨을 건지고 절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후 전국 각지를 떠돌았는데, 그 경험을 살려 쓴 책이 '택리지'이다. 그가 전국을 돌아다닌 이유는 '살만한 곳(可居地)'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살만한 곳'을 찾는 데 실패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무릇 사대부가 사는 곳치고 인심이 무너져 내리지 않은 곳이 없다. 당파를 만들어 遊客(유객)을 불러들이고, 권세를 부려서 백성들을 침해하기도 한다. 자신의 행실은 잘 닦지 않으면서 남이 자기를 논하는 것을 싫어하며, 한 지방의 패권 잡기를 좋아한다. 동리와 골목에서는 서로 헐뜯기를 일삼으니 그 속마음을 헤아리기가 불가능하다.('택리지' 인심조)"

여기에서 사대부란 당쟁을 일삼는 정치인과 이들에 휩쓸린 양반 사대부를 뜻하는 것이다. 이들이 존재하는 곳치고 '인심이 무너져 내리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살만한 곳'을 찾는 데 실패한 것이다. 영조 28년(1752) 睦會敬(목회경)은 '택리지' 발문에서, "이중환은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살 집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년에는 농사꾼(老農老圃)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마저도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택리지'를 쓰게 된 것이다. 서쪽도 마땅치 않고, 북쪽도 마땅치 않으며, 동쪽과 남쪽에도 알맞은 곳이 없다 하며, 아무 데도 살만한 곳이 없다고 탄식했다. 인심이 험함과 세상의 박절함을 여기서도 볼 수 있으니 그의 뜻이 너무나 슬프게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이중환은 인심이 박절하게 된 것을 당쟁 때문이라고 보았다. "당쟁이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데서 발생했으나 그 자손들이 조상들의 黨論(당론)을 이어가며 고수해왔기 때문에 지난 200여년 동안 굳을 대로 굳어져서 이제는 깰 수 없게 되었다"라면서 "비록 행실을 닦고 큰 덕을 쌓은 사람이라도 자기 당파가 아니면 먼저 그 사람에게 나쁜 점이 있는지를 살핀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마치 지금의 현실을 말하는 것만 같다.

"무릇 천지가 생긴 이래 이 세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나라 중에서 인심이 타락해서 그 떳떳한 천성마저도 상실한 나라가 붕당의 폐단으로 가득 찬 오늘날의 우리나라 말고 또 있겠는가? ('택리지' 인심조)"

이중환의 탄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大義(대의)에 신명을 거는 정객은 찾기 어렵고 黨益(당익)과 私益(사익)에만 눈 먼 정상배들만 이중환이 살았던 세상처럼 우글거려 보인다. 정치가 직업인 이들이 자신들의 싸움에 일반 국민들을 끌어들이면서 마치 전 국민이 당쟁에 가담하는 형국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중환의 "이를 그대로 두고 바로 잡지 않는다면 장차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라는 탄식은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야 할 한탄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고치지 않으면 후대가 다시 탄식할 것이니 어찌 두고만 보고 있겠는가?

이덕일(역사평론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