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기행] 이성복의 '남해금산'

'남해에 가고 싶어요.'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는 물음에 난 습관처럼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남해라는 이름을 지닌 섬은 내 그리움의 고향 같기도 했다. 그 그리움의 중심에 이성복의 시가 있었다. 바람에 따라 실려오는 안개 속에서 멀리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섬들을 남해 금산에서 내려다보고 싶었던 게다. 거기 돌 속에 들어간 한 여자와 나란히 서서 그리움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해는 멀었다. 삼천포, 통영, 하동, 순천, 강진, 해남을 지나면서도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정작 남해는 들르지 못했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어디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다시 남해에 갈 거라고 말했다. 어느 여름 날, 비 많이 오는 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차를 몰고 닿은 곳. 거기가 미조포구였고 거기가 금산이었다.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나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 어느 겨울 두 번째로 찾은 금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식당을 찾았다. 여름 어느 날, 비 많이 오는 날. 정말 맛있게 먹은 생선찌개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식당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푸근한 주인 아주머니의 인심도 그대로 있었다. 산을 올랐다. 681m의 그리 높지 않은 산. 하지만 섬이기 때문에 그리 녹록한 오름길은 아니다. 사위는 온통 안개로 가득했다. 신비한 쌍홍문을 지나 보리암에 닿아서도 결국 바다는 보지 못했다. 5m 앞도 안개로 막혀 있었다. 위태롭게 난간에 기대어 뚫어져라 안개 속을 들여다보았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슬픈 습기가 얼굴을 스쳤지만 안개 속에는 안개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목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결국 그 여자는 돌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이성복의 '남해금산'을 읊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이성복, '남해금산' 전문)

한 여자가 남해금산의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기는 꿈을 꾸면서 난 다시 살아났다. 한 여자가 돌 사이로 들어가는 꿈을 꾸면서 난 다시 호흡했다. 한 여자와 돌 속에서 슬픈 사랑을 하고 여자는 울면서 떠나버렸다. 그 여자는 해와 달이 끌어주었지만 난 결국 남해 금산 푸른 하늘과 바닷물에 혼자 잠기어갔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절대 낯선 길에선 헤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 복사기 옆에 헝클어진 파지처럼 질서도 없이 존재하다가 갑자기 내 영혼을 자극하는 지난 시간의 기억들. 멀리 날아가라고 연줄을 끊었는데 끊어진 연은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고 마을 앞 미루나무에 걸려있는 형국. 그게 어쩌면 내 기억이다. 어쩌면 거기에 내 숨길 수 없는 노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떠남이 만나는 길임을 깨달으면서 비우는 것이 채우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난 내 삶이 두 개의 다른 죽음 사이에 말이음표처럼 놓여 있다는 걸 인식했다. 사실 모든 사랑은 위험하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 사랑은 금산의 안개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슬프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아름답기도 하다는 것을 여기 금산에서 다시 깨달았다. 그렇다. 남해 금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랑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다. 사랑은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그 사람의 그림자에 시선이 머무는 행위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이 내 안에 무늬를 그린다.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를 위해 하나의 사물이 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돌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푸른 하늘에, 푸른 바닷물에 잠기기도 해야 하는 것이 사랑이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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