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돌아왔다. 지난 21년간 계명대 총장을 역임했던 신일희(69) 박사는 4년의 공백을 거친 뒤 지난 7일 제9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돌아왔다'거나 '공백'이라는 표현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비록 총장직은 떠나 있었지만 지난 4년 그는 계명대 명예총장이었고, 약 2년간 학교법인 계명대학교 이사장이었다. 인물에 대한 평가에 있어 그만큼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도 드물다. 계명대 사유화 논란을 둘러싼 학내 분규의 정점에 있었다는 비난과 성서캠퍼스 이전 등 학교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한 인물이라는 평가다. 지난 7일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총장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다소 민감한 질문에 대한 양해를 구한 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난 양심에 걸리지 않는 일을 했다."
-계명대를 사유화하고 있다는 논란이 여전히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유화 운운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국법이 장님도 아니고, 어떻게 공공 교육기관을 사유화합니까? 계명대 나무 한 그루, 꽃 한 포기, 벽돌 한 장, 총장 아니라 총장 할아버지라고 해도 개인이 소유권을 행사 못 합니다. 사유화라는 것은 만들어낸 말이지, 어떻게 사유화해요? 안 보셨습니까? 4년 전 제가 학교를 떠났습니다. 끝! 그것이 무슨 사유화입니까?"
-지난 2004년에 작고한 신태식 전 총장님에 대한 부당 지급건, 그 재판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지난 2001년 신 총장은 대학정관과 직제 규정의 근거도 없이 부친인 신태식 전 총장을 명예총장으로 추대한 뒤 매달 70만~80만원씩 1억2천300만원을 활동비 명목으로 지급한 혐의로 기소됐으며, 이후 대법원 최종심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이 그렇게 판결했더라도 아직도 이해 못 합니다. 판결을 받고 벌금을 문 것이 2004년입니다. 그 전에 (성서캠퍼스로) 이전해 오면서 재정압박이 많았습니다. 그때 이사회 결의로 명예총장님을 추대했습니다. 월급도 없이 활동비로 월 70만원 드리고, 서울에 사는 매제가 사준 차를 몰기 위해 임시기사를 쓰도록 했습니다. 임시기사 월급이 한 100만원 나갔어요. 명예총장님이 월 70만원 받으시면서 모은 발전기금이 10억원 가까이 됩니다. 단지 규정이 없어서 공금을 불법 지출했다고 (법원이) 판단한 것입니다."
-이사회에서 명예총장을 추대하면서 정관 또는 교칙을 개정해야 하는데, 실수였습니까?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 하기 위해서, 내 양심에 걸리지 않는 일을 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길 가다가 옆집에서 도와달라는 소리를 들으면 창문을 부수고 들어갑니다. 법의 잣대로 보면 불법 침입이죠. 하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돕는 것이 도리인데 불행히도 그게 법의 사고에 안 맞는 겁니다. 지금도 이해를 못 합니다." (최종 벌금이 얼마였나요?) "대단히 미안하지만 죄의식을 전혀 안 느끼기 때문에 기억을 별로 안 합니다. 지금도 그런 분이 계시면 활용하겠어요. 벌금을 물더라도 또 하겠습니다."
◆"과연 그들이 계명대를 위해 진정 기도한 적이 있나?"
-지난 2004년 당시 총장님이 다시 후보로 추천됐을 때 지역 시민사회단체에서 반대 성명을 냈습니다. 하고픈 말씀은?
"조금 교만한 생각이지만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계명대를 위해서 단 반나절이라도 진지하게 기도해 본 적이 있나, 그것도 아니면 후진들을 위해서 몇 푼의 장학금이라도 내 본 적이 있나? 그런 경험이 있는 분이 '학교가 잘못됐다' '왜 이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두느냐'고 말한다면 우리가 경청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길거리 사람의 말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직접적인 연관성 여부를 떠나서 그간 해직된 교수님들에게 다시 총장이 되고 난 뒤 하고픈 말이 있다면?
"특별히 전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해직이라기보다 계약이 만기돼 재계약이 안 된 분들이죠. 그건 미안한 이야기지만 외국에서는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계약제입니다. 계약에 의해 양방 중에 어느 한 부분이라도 계약 갱신 안 하겠다면 그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적 분위기는 그게 아니죠. 한번 계약하면 종신계약이 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총장 후보추천위원회에서 이름이 거명된 뒤 고사할 뜻을 비친 것으로 압니다. 끝까지 고사할 수는 없었습니까?
(그는 들릴 듯 말듯 '하~'하는 탄식을 자아낸 뒤) "그게 좀 부끄럽다고 할지. 사적인 이유가 거기에 개입이 돼서 그렇습니다. 현 이사님들은 지난 십수년 동안 학교를 지켜오며 저 때문에 많은 수모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성지까지 박탈당하면서 경찰, 검찰에 불려다니며 조사받았습니다. 그런 이사님들이 권고위원회까지 만드셔서 세 차례에 걸쳐서 강하게 권고하실 때 인간적으로 제가 그것을 끝까지 거부·거절·항명할 힘이 안 됩디다. 만약 다른 이사회와 이사였더라면 끝까지 제 생각을 관철했을 겁니다."
◆"기독교 사립대학에서 나는 청지기 역할"
-왜 이사회에서는 총장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판단했을까요?
"이사회 결정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다시 총장이 돼야 할 논리적 필요성, 현실적 당위성에 대해 일부러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사회가 기대하는 것이 학교발전이라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통해서 그 필요성과 당위성이 형성돼 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사회에서 사명을 주었기 대문에 이것은 '청지기'로서 안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와 관계없는 사립대학이라면 다른 결론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에서는 청지기 개념입니다. 주인이 일을 시키면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것이 청지기 개념입니다."
-만약 다시 총장 퇴진 문제로 과거와 같은 분규사태가 불거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법적인 체제로서 이사회가 결정한 것은 이 기관 안에서 통용돼야 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반대한다고 순응해서 물러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죠.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법이 그렇습니다. 대중 민중에 의해서 왔다갔다 하는 그런 교육기관이 아니거든요." (총장 직선제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아주 나쁜 제도입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총장직선제를 해 봤습니다. 그 폐단을 인식하고 전국에서 가장 먼저 폐지한 학교도 계명대학교입니다. 뒤엎어 놓으면 저희들이 항상 앞서가고 그렇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진정한 관심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무엇입니까?
(그는 한참을 생각에 잠긴 뒤) "목적도 분명하고 목적지도 보이는데. 민주화의 이름 아래 이런저런 여론으로 표명하는 거야 뭐라고 하겠습니까만,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우리 구성원들. 아, 답답하고 힘들었죠. 그런 비생산적인 사고와 행위를 갖고는 절대 도움이 안 된다는 그런 판단이 섰죠. 그때 답답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미웠습니까?) "밉고 좋고 그런 건 별로 없습니다. 한 예로 거기에 제일 앞장서서 하신 분이 계셨어요. 심지어는 어느 집회에서 자기 재산과 시간, 모든 것을 투자해서 어느 누구를 쫓아낸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 분께 정년퇴임할 때 명예교수직을 드렸습니다. 그건 미움의 표시는 아니지요. 답답했지요."
-총장님께 지금 당장 누군가가 1천억원을 준다면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동산의료원의 성서 이전에 쓰겠습니다. 부분적이지만 1천억원으로는 부족합니다. 지난번 매각 운운할 때 얼핏 3천억원이라는 숫자를 제가 기억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로도 안 되는 것으로 압니다." (부지 매각 계획은?) "없습니다. 이전 문제는 의료원에서 원동력이 나와야 됩니다. 이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요성과 의지가 그 안 구성원들에게서 생성되어야지 외부에서 주입시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구성원들이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를 가지고 일을 하면 이룰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돈이 가장 아쉬웠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유학생활 아니었겠습니까?" (그는 15세에 당시 100달러를 환전해 미국으로 떠났다. 배와 기차를 타고 태평양, 미 대륙을 횡단해 4주 만에 동부에 닿았다.) "중학교 졸업하고 갔습니다. 그쪽 노동법에 의해 열여섯, 열일곱살짜리가 합법적으로 노동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반불법노동 비슷하게 임시로 일했죠. 겨울방학 때 공사장에서 자갈 짊어지고 일해봤고, (미국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화장실 청소도 했습니다. 폭염 속에서 키보다 훨씬 큰 골프클럽을 양쪽 어깨에 둘러메고 캐디 노릇도 했습니다. 그렇게 돈벌이를 했는데도 하루에 햄버거 하나를 먹으며 지냈습니다." (그는 집 떠난 지 8년 만에 처음 한국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그는 확대간부회의 때문에 미안하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정말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학교가 잘 되기를 위해 마음 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당부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평정심을 유지했고, 소신에 찬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짧은 대화를 통해 평가하거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신일희 총장은?
1939년 대구에서 태어난 뒤 1954년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켄트고교, 트리니티대를 졸업했다.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고 뉴욕시립대 전임교수, 독일 키엘대 객원교수, 연세대 교수를 거쳐 1974년 계명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초대 및 4~7대 총장 등 21년간 총장을 역임했으며, 지난 2001년 프린스턴대 '저명동문 100인'에 선정됐고 폴란드 대십자 훈장, 5·16 민족상, 아시아인 최초로 폴란드 국립쇼팽음악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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