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화가' 고 박수근 화백의 그림에는 길가의 노점상이나 행상이 자주 등장한다.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가장 거룩한 그의 작품에서 사람들은 따스한 정을 느낀다. 뜨거운 여름 기운을 내뿜는 도로 가장자리 한쪽에서 좌판을 벌이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철 지난 헌 옷, 주름진 피부…. 할머니들은 여름 한낮의 숨막히는 열풍이나 한겨울의 살을 에는 듯한 바람 속에서도 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몇 천원의 푼돈 장사를 하는 이들. 물건을 고르고 한마디 건네면 돌아오는 구수한 사투리 답변이 정겹다. 그들은 하루에 얼마나 벌고 어떤 삶을 살까.
◆정이 오가는 삶의 현장
대구 지하철 반월당역 입구 주변에는 야채며 과일을 펼쳐 놓은 할머니들이 있다. 지난 8일 오후 현장을 찾으니 언뜻 보기에도 60대 이상은 됨직한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들이 손수 기른 농작물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이 굵어 먹음직스러운 오이를 내어 놓은 60대 할머니는 가창에서 왔다. 이 할머니는 "처음 따서 내왔다. 나도 아직 맛을 못 봤다"고 했다. 오이를 한입 베어 먹으니 상큼한 맛이 혀끝으로 전해왔다. 깻잎단에서는 강한 깻잎 향이 흘렀다.
"멀리 나오셨네요"라며 안부차 얘길 하니 "이곳에 오는 것이 버릇이 됐다"며 "대신동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고 일러줬다. 남편과 함께 직접 농사 지은 오이와 고추, 깻잎 등의 야채에 복숭아, 자두가 할머니가 팔고 있는 품목이었다. 대여섯 종류 농산물을 팔아서 과연 얼마나 벌까? "얼마 못 번다"는 할머니는 "날도 더워 장사가 더 안 된다"고 했다. 오이 다섯 개가 2천원, 깻잎 한 묶음이 500원이었다. 다 팔렸을 때를 가정해 대충 셈을 해봐도 몇만원 수준이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름 뙤약볕에 앉아 있는 것치고는 많지 않은 금액이었다.
건너편에선 자두를 팔고 있었다. 올해 67세라는 할머니는 경산 자인에서 자두 세 상자를 손수레에 실어 직접 옮겨 왔다. 플라스틱 상자에 가득 담으면 한 상자에 5㎏은 훨씬 넘을 것 같았다. 20㎏ 넘는 짐인데 할머니는 두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온 거라고 했다. 할머니는 "매일 오는 것은 아니지만 버스를 탈 때마다 기사한테 욕을 먹는다. 차비도 2천원 넘게 드는데 너무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할머니가 파는 자두는 일종의 하품(下品)이다. 상품으로 출하할 정도가 안 되는 양과 크기의 열매를 모아 판다. 그래도 "올해는 날이 가물어 과일이 달다"며 자두 한 알을 먹어 보라며 손수 건넸다. 한 소쿠리(약 2㎏)에 3천원. 한 상자에 3만원인데 소쿠리에 담아 팔면 이보다 적게 번다고 했다. 세 상자 모두 팔면 9만원 벌이인 셈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포도에 복숭아 농사도 같이 하고 있단다. 어릴 때부터 시작해 시집 와서도 계속된 농사일이다. 그래도 "정신없이 농사 짓느라 아플 틈도 없었다"며 농을 건넨다. 할머니는 그렇게 자식도 다 키웠다. 할머니는 "자식들 출가시키다 보니 모은 돈도 없다"면서도 "시골이지만 내 집 한 채 있으니 괜찮다. 나이 많아도 할 일도 있다"며 행복해 했다.
지난 8일 오후 만난 노상의 할머니들은 사는 얘기를 들려주며 '잘 먹으라'는 인사를 잊지 않아 대형마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살가움을 전해 주었다.
◆시장 좌판에선 불경기 얘기 가득
같은 날 오전에 들른 칠성시장 좌판 할머니들에게는 말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극심한 재래시장 불경기 탓이었다.
고등어와 갈치를 팔고 있는 70세의 할머니는 "30년 넘게 장사를 했는데 요즘 장사가 되지 않아 밥 대신에 술만 마신다. 막걸리 세 병 마시고 집에 간다"고 했다. 어제 산 오징어를 한 마리도 못 팔았단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수협공판장에서 운반비까지 지급하며 떼오는 생선이 안 팔려 속상하다고 했다. 지난번에 못 팔고 남은 오징어도 버렸다. "날이 더워 못 팔면 바로 쓰레기"라며 속풀이 한탄을 연방 쏟아내던 할머니였지만 손님이 오자마자 고등어 3손(여섯 마리)을 순식간에 다듬어냈다.
야채를 파는 50대 박모(여)씨는 경력이 20여년이다. 1㎏당 2천원에 파는 배춧잎 다듬은 것을 손님이 '달라는 대로' 판다. "얼마나 버느냐?"고 물었지만 "벌이라고 할 수 없다. 경기는 기자가 더 잘 알지 않느냐?"란 핀잔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6시나 돼서 파하면 그대로 잔다. 많이 피곤해서 잠은 잘 온다"는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과일 장수 유모(66·여)씨도 별반 사정은 다르지 않다. 30년 가까운 좌판 생활에 유씨에게 남은 거라곤 도로 위 3.3㎡(한 평)도 안 되는 자그마한 공간뿐이다. 유씨는 "그래도 20년 넘게 단속반에 쫓기며 한 소쿠리씩 팔며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다녔던 것보다는 낫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씨가 파는 과일은 칠성시장 내 과일상에서 구매한 상품이다. "손님이 없어 재고가 되고 썩어서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유씨는 "대형마트가 생기기 전에는 밤 11시까지 장사했는데 요즘엔 해지면 놀다가 들어간다"는 말도 덧붙였다.
과일 판매로 번 돈도 자식들 출가시키면서 야금야금 바닥이 났다. 유씨는 현재 대구 동구 모처에 셋집을 얻어 혼자 살고 있다. 자식들은 나름대로 어렵지만 잘 살고 있다. 집안 대소사 때마다 찾아온단다. 중3, 고1 손자가 있다기에 '귀엽겠네요?'라고 물으니 빙긋이 웃기만 했다. 유씨에게 이제 과일 좌판은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뭐하겠나? 노는 것보다야 바람도 쐬고 하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하는 일이다. 유씨는 "시장 좌판에선 5천원짜리가 말만 잘하면 4천원, 3천원이 되기도 한다. 덤도 주는데 사람들이 안 온다"며 말을 맺었다.
시장에서 만난 좌판 할머니들은 대형마트에 치이고 '고정박이' 상인들(새벽에 시장 도로를 점거해 물품을 팔고 가는 행상)에 밟히는 일종의 샌드위치 신세였다. 어느 누구도 쉽게 풀지 못할 문제로 이들의 얼굴엔 불황의 그림자만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 "할머니 情 느껴져 일부러 좌판에서 물건사요"
시장 좌판에서 물건을 사는 이들은 대형마트에서 느낄 수 없는 다른 감흥이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개선해야 할 점도 이야기한다.
주부 이미영(30)씨는 재래시장을 애용한다. 서문시장에서 장을 보는 시어머니의 영향 때문에 재미를 붙였다. 이씨는 "품질에 비해 물건도 싸고 정감도 느낄 수 있어서 좌판에서 물건을 산다"고 했다. 가끔 좌판을 이용한다는 한 외국인은 "할머니들이 정답게 얘기를 붙이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다. 덤으로 물건을 끼워주는 것도 묘미"라고 밝혔다.
30대 직장인 고모씨는 '남을 돕는 기분'으로 좌판을 이용한다. 그는 "1천~2천원 정도만 쓰는데 할머니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는 "관문시장에 어머니를 닮은 분이 장사를 하고 있다. 지나갈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더욱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동한다"고 덧붙였다. 민모(45)씨는 사람 만나는 재미로 재래시장을 자주 찾는다. 칠성시장에서는 고향인 청도 사람을 만나 살가운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이에 반해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38)씨는 더는 좌판에서 야채를 구입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할머니들이 안쓰럽기도 해서 물건을 샀다. 그런데 품질이 떨어져 더 이상은 안 산다. 어떤 때는 야채 속이 짓물러 있기도 했다.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소비자들이 대형마트를 선호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품질에 대한 신뢰다. 중간상으로부터 농산물을 구매해 길거리에서 팔 경우 원산지도 알 수 없다. "직접 길렀다고는 하지만 믿음 반 의심 반"이라는 소비자들의 의구심을 탓할 수만은 없다. 정감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좌판도 신뢰회복이 이제 필요해 보인다.
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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