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간 독도 분쟁의 역사에서 안용복(安龍福)이라는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 숙종 때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이 울릉도·독도의 영유권에 대한 확인을 일본 막부로부터 얻어낸 민간 외교가 역할을 한 사람이다.
안용복은 경상도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 수군에서 노를 젓는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하면서, 왜관(倭館·조선시대 일본인의 입국 및 교역을 위해 설치됐던 장소)에 자주 출입해 일본말에 능했다.
숙종 19년(1693) 여름 그는 배를 타고 표류하다가 울릉도에 다다랐다. 당시 조선 조정은 울릉도 공도(空島)정책을 펴고 있었다. 죄를 짓거나 조세·군역을 피하기 위해 울릉도에 숨어드는 사람이 많자, 조정은 울릉도 거주민들을 강제로 뭍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울릉도에는 몰래 들어간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 같은 치안 부재 상황 속에 왜구들의 침입과 노략질이 잦았다.
이곳에서 안용복은 울릉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어민과 맞서다가 납치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안용복은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는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강력히 주장한 끝에 일본 막부(幕府)로부터 '울릉도에 일본인이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담긴 확인 문서까지 받아낸다. 그러나 이후 안용복은 이 문서를 대마도 도주에게 강탈당하고, 와중에 문건마저 '울릉도는 일본땅이니 조선 배가 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켜 달라'는 내용으로 위조됐다. 게다가 안용복은 다른 나라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죄목으로 2년의 형벌까지 받는다.
이후 안용복은 숙종 22년(1696)에 다시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일본 어선을 발견했다. 안용복은 조선 선원과 함께 독도까지 추격했다. 안용복은 조선 관리인 것처럼 차려입고 일본의 호키슈(伯耆州) 태수에게 어민들의 국경 침범에 대해 항의해, 호키슈 태수로부터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이듬해(1697) 일본 막부는 대마도 도주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인정하고 일본 어부들의 출어를 금지하는 내용의 문서와 사신을 보내왔다.
조정을 대신해 영토를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안용복은 이번에도 상이 아니라 벌을 받았다. 관원을 사칭하고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정에 압송된 그에 대해 사형까지 논의됐으나 좌의정 윤지완과 영의정 남구만 등의 변호로 그는 목숨을 구하고 귀양을 가게 된다. 조선말 실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안용복의 공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치하한 뒤 '그에게 상을 주지 않고 사형에 처하려다 귀양을 보냈다. 그의 기상을 꺾어버리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애통한 일이다'라고 했다.
일본은 이때의 기록을 '안용복이 국법을 어기고 일본에 불법으로 건너왔다가 둘러댄 내용'이라며 깎아내리고 있다. 그러나 2005년 공개된 안용복 취조 관련 문서(朝鮮舟着岸 一券之覺書)를 보면 '울릉도와 독도가 강원도에 속한다'는 기록이 들어있다. 당시 일본이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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