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아낙들을 모아놓고 김추자의 '늦기 전에'를 부르는 여인이 있다.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 주오. 내 마음 모두 그대 생각 넘칠 때. 그대가 늦어지면 내 마음도 다시는 찾을 수 없어요.
순이(수애)라는 순박한 이름의 여인. 그녀가 애절하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님'은 누구일까.
대학물 먹은 남편은 군대에 가고, 시어머니는 3대 독자인 아들의 씨를 받기 위해 그녀를 닦달한다. 면회 간 그녀에게 남편은 뒤돌아 누우며 말한다. "니 사랑이 뭔지 아나?" 애인을 못 잊어하던 남편은 말없이 훌쩍 월남으로 떠나고, 시어머니는 "내는 본처가 아니면 첩의 애라도 봐야겠다"며 그녀를 내친다. 소박을 맞아도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이제 그녀는 월남으로 가야 한다.
주로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스크린에 녹여 넣는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 곳에'는 남편 찾아 월남으로 떠난 순이의 험난한 역정을 그린 영화다. 70년대 배경과 함께 김추자의 노래가 전편에 흐르는 향수의 영화다.
순이는 사실 70년대 어머니 세대의 얼굴이다.
"니 사랑이 뭔지 아나?"라고 해도 남편의 등만 쳐다보며 해 간 음식을 입에 꾸역꾸역 넣을 수밖에 없는 것은 비단 순이만의 운명이 아니었다.
그런 순이가 돈이 궁한 위문공연 밴드 리더 정만(정진영)을 만나 월남행 배에 오른다. 그러나 낯선 사이공에 도착해보니 사정이 딴 판이다. 천신만고 끝에 미군 신병 앞에 선 순이. 이제 그녀는 순박한 순이가 아니라 써니라는 예명의 가수다.
순 제작비 70억원. 3개월간 태국 현지 촬영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총탄이 궤적을 그리며 스치는 등 전투장면은 이제까지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사실적이고 현장감 넘친다.
특히 스타로 떠오른 그녀가 헬리콥터에 타고 나직하게 부르는 김추자의 노래 '님은 먼 곳에'는 전쟁의 비장미를 애절한 감수성으로 엮어낸다. 땅에서는 포탄이 터지고, 죽음이 널려 있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스크린 너머 들릴 듯 말 듯한 수애의 노래는 그들의 절망마저 쓰다듬는 듯하다.
'님은 먼 곳에'는 상당히 감성적이며 여러 뜻을 은유하는 제목이다.
"님"을 찾아 이국 먼 땅에 온 순이의 처지와 함께 사랑한다고 말할 것을 하지 못하고 전쟁에 온 많은 병사들의 간절함이 묻어난다. 로맨티스트이자 사람에 대한 남다른 따뜻함을 가진 이준익 감독의 감성을 엿보게 해준다.
그의 감성은 캐릭터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급조된 위문공연단 '와이 낫(Why Not)' 멤버들, 돈밖에 모르지만 착한 리더 정만과 순이를 늘 따뜻하게 위로하는 베이시스트 용득(정경호), 불만투성이의 막내인 드러머 철식(신현탁), 맏형인 기타리스트 성찬(주진모)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전우이고, 또한 형제자매이다.
특히 순이가 강인한 여성 써니로 변해가는 과정을 섬세한 표정과 절제미로 표현하는 수애의 연기가 감동을 전해준다.
베트콩에게 "돈 벌러 왔다"고 하자 "한국군이 다 그래"라는 등 월남전에 대한 색다른 시선과 함께 감독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이 돋보인다.
'님은 먼 곳에'는 '라디오스타'와 '즐거운 인생'과 함께 향수의 음악영화 3부작의 마지막편이다.
'수지Q'에 '베이비 아이 러브 유', '울릉도 트위스트' 등 신나는 노래와 함께 명곡인 '대니 보이' 등이 전쟁터에서 만나는 오브리 밴드(현장 즉석밴드)의 맛을 더해준다. 그래도 가장 큰 것은 김추자이다.
그녀는 70년대 초 전국을 뒤흔든 섹시 가수였다. 요즘처럼 몸을 털며 섹시에만 목을 매는 그런 여가수가 아니었다. 도발적이며, 체제 도전적인 가수였다. 노래도 빼어나 '님은 먼 곳에' 등은 가요사의 명곡에 속한다.
어떻게 보면 김추자의 이미지는 청순가련형 순이의 몸속에 이미 이글대고 있었고, 그것이 써니를 통해 구현된 것이다.
"여성의 시점에서 전쟁의 이면을 바라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은 다소 지나쳐 보인다. 여성이 주인공인 월남전 배경의 영화일 뿐이다. 순이가 월남에 간다는 것 이미 판타지다.
목숨을 걸고 '볼품없는' 남편을 찾아 나선다는 설정이 신세대 여성들에게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여성주의적 시선이 아니라 가족을 지켜야 하는 한 인간의 희생적인 몸부림이고, 그 과정에서 오롯이 홀로 서는 한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떠난 애인을 못 잊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전근대적인 한 남자에게 "그래! 니가 말하는 사랑이 뭔데?"라며 일갈하며,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던지고 있다.
'님은 먼 곳에'는 남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그래서 너무나 먼 곳에 있는 나를 찾는 70년대 한 여성의 모험담이고 여행기이다. 126분. 15세 관람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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