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미국인에게 영어 가르치는 한국인' 홍효창 교수

한국인이 중·고·대학교 10년간 영어를 배우는데 쓰는 시간은 평균 1만5천548시간. 한국영어교육학회 자료다. 10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4시간 넘게 공부한다는 뜻이다. OECD 국가 평균의 1.5배 수준. 우리 국민이 연간 영어 사교육에 투자하는 비용은 무려 15조원으로 일본의 3배에 이른다. 인구 대비로 따져볼 때 1인당 사교육비가 거의 7배에 달하는 셈. 영어는 한국인에게 영원한 숙제처럼 남아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 대학에서 다른 과목도 아닌 '영어'를 가르치는 한국인 교수의 이야기는 자못 신기하게 여겨졌다. 홍효창(38)씨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헌팅턴에 위치한 주립대학인 마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부교수(Associate Professor)로 재직 중이다. 1천300~1천년 전의 고대 영어를 전공했고, 학부 및 대학원생들에게 언어학·문법·작문·고대 영어를 강의한다. 여름휴가차 일시 귀국한 그를 지난 24일 만나 영어 이야기를 나눠봤다.

◆중학교 영어시험 30~40점 받던 영어 교수

-중·고교 시절에 영어를 꽤 잘했을 것 같은데요. 비결이 있었나요?

"처음에는 영어를 전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중학교 1학년 때만 해도 영어는 매국노나 배우는 것이라며 영어수업을 전혀 듣지 않았죠. 1학기가 끝날 때까지 알파벳도 다 떼지 못했습니다. 시험 성적은 30~40점이었죠. 당시 영남대 교수로 계시던 아버지가 엄청 화를 내셨어요. 한문과 중국어를 가르치셨는데, 마치 한문 공부하는 식으로 영어를 공부하도록 시키셨습니다. 자습서도 필요없고, 학원은 더욱더 필요없다고 하셨습니다. 책을 들고와서는 '여기부터 저기까지 공부해라. 못 끝내면 밥도 먹지마라'고 하셨어요. 영어 단어 옆에 한글로 뜻을 적어두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죠. 모르면 매번 사전을 찾아야 했습니다. 교과서 영어 테이프도 무조건 따라 읽었습니다. 그렇게 2주를 공부했더니 중학교 1학년 교과서를 다 외울 지경이 됐습니다. 이후에 1~3학년 교과서를 다 외웠고, 2학년 때 영어시험 100점을 맞자 아버지가 이후에는 혼자서 공부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때부터 영어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죠."

-중학교까지는 영어를 잘 하다가 도중에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은데, 어떠셨나요?

"형이 영어 공부한다며 사 모은 책 중에 생활영어도 있었습니다. 각 장(章)이 끝나는 곳에 미국 생활과 문화에 대한 소개 글이 있었는데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단순히 영어를 배우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고교에 올라가서는 당시 5종 교과서 중 하나만 배웠는데, 그것도 전부 외웠습니다. 1학년 마칠 무렵 쓰기 시작한 영어 일기는 군대 가기 전까지 5, 6년간 계속 썼습니다. 지금도 수십 권의 일기가 남아있어요."

-그렇게 열심히 영어를 한 이유가 뭡니까?

"기왕 하는 거 잘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 땅에 가서 영어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대학에서 단어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 작은 영영사전을 하나 사서 다 외워보자고 결심했죠. 단어가 들어가는 예문도 외웠습니다. 잘 외워지지 않으면 팔뚝에 써놓기도 했어요. 버스 탈 때 손잡이를 잡으면 바로 눈에 들어오도록. 신발에도 적었습니다. 신발 끈을 매고 풀 때마다 볼 수 있으니까요. 하여튼 여백이 있는 공간은 전부 연습장이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 응시해본 토플 시험에서 600점, 유학가기 전에는 628점을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기왕에 하는 영어, 뿌리를 뽑고 싶었다

-미국에 건너가 영어를 가르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교 시절 우연히 대구 모대학 영어경시대회에 나갔습니다. 원어민 교수와 면담을 하는데 대뜸 '나중에 뭘 하고 싶으냐?'고 묻더군요. 그때 '미국에서 영어 교수를 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다소 놀란 표정의 교수는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Forget it!'(집어치워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답하더군요. 너무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내가 반드시 미국 대학에서 영어 교수가 되고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라. 아무 말 못하게 해주겠다'고 말해버렸습니다. 물론 상은 받았습니다."

-유학 가서 학위 받고, 교수로 임용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일찌감치 졸업학점을 이수해서 동기들이 2학기 올라갈 때 저는 대학원에 진학했죠. 마침 영남대가 미국 인디애나주 볼 스테이트대학교와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석사과정을 무료로 다닐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어요. 거기에 지원해 운좋게 뽑힌 거죠. 고민하다가 고대 영어를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기왕에 영어를 하려면 뿌리부터 파헤쳐보자고 생각했는데, 마침 볼 스테이트대학에 고대 영어를 전공한 교수님이 계시더군요. 석사 마치고 돌아오려니 너무 아쉬워 바로 다음 학기에 박사과정에 들어갔죠. 그러던 중에 마샬대에서 교수 채용공고가 나더군요. 서류전형을 거치고 면접, 시범수업까지 했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 기회가 온 거죠. 박사학위를 그곳에서 마치는 조건으로 조교수(Assistant Professor)로 임용됐습니다. 그때가 2002년이었고, 2003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지난해 부교수로 승진했습니다."

-마샬대는 어떤 곳이고, 전공하는 고대 영어는 현대 영어와 얼마나 다릅니까?

"미국 초대 법무부 장관인 존 마샬(John Marshall)의 이름을 딴 학교입니다. 주립대학이고,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두번째로 큰 대학입니다. 학생 수는 의과대학을 포함해서 1만4천~1만6천명 정도이고요. 고대 영어를 처음 접한 것은 학부시절 '영어사' 과목을 들을 때였습니다. 기독교의 주기도문을 고대 영어로 써놨는데 읽지도 못하겠더군요. 단어도 완전히 다르고 발음하는 법도 전혀 다릅니다. 스펠링 하나하나에 따라 발음 규칙이 있고, 예외도 많습니다. 워낙 어려운 과목이다 보니 미국에서도 학부가 아니라 대학원에서 개설하는 과목이에요."

◆목적없는 영어 학습은 앵무새 흉내

-미국 유학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자화자찬처럼 들리겠지만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수업 듣는 것이나 동료 학생들과 생활하는데도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한국 유학생도 많았고. 저 역시 대구 출신 유학생 중 한 명과 결혼을 했죠.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작문 숙제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적응하기 무척 힘들었습니다. 미국 대학에서는 모든 학생은 작문 수업을 필수로 들어야 합니다. 지금 대학에서 언어학, 음성학, 문법 등과 함께 작문 수업도 가르치고 있는데, 당시 석사과정에서 힘들게 공부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영어 교육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보시나요?

"영어를 배우는 목적의식이 결여돼 있습니다. 언어는 다른 문화를 접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훌륭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영어를 출세를 위한 도구로 여기는 바람에 이해는커녕 오히려 남들과 격리시키고 관계를 나쁘게 만드는 경우를 많이 봐요.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는 식의 공부는 지양해야 합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영어몰입교육'이 논란을 빚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니 말하기 어렵습니다. '몰입교육'이라는 말은 새로운 용어가 아니라 교수법에 있는 말입니다. 영어로 'Immersion Program'이라고 부르죠. 'immerse'라는 말이 '푹 담그다'라는 뜻이잖아요. 영어를 열심히 배우도록 하는 자체는 좋습니다. 하지만 외적인 동기부여가 중요하죠. 단지 한국어를 영어로 바꿔서 수업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어를 왜 배웁니까? 앵무새도 반복 학습 시키면 영어로 떠듭니다. 미국에서는 거지도 영어로 말합니다. 영어만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어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죠. 왜 영어를 배우고 말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말하기와 듣기 교육이 많이 강조되는데….

"말하기와 듣기에 너무 치중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아주 어려서부터 영어를 마치 모국어처럼 접한다면 몰라도, 우리에게 영어는 어쩔 수 없는 외국어입니다. 효과적인 영어 학습법은 글을 쓰는 거예요. 글은 사고의 마지막 형태입니다. 말하기와 듣기를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작문이 소외되는 느낌입니다. 글을 쓰면 말문은 저절로 트입니다. 이를 위해 많이 읽는 것이 필수이지요. 좋은 문장은 따라서 적어보는 거죠. 한국 유학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작문이 안 되니까 심지어 숙제를 하면서 남의 글을 베낍니다. 1차 적발시 경고 조치되고, 2차에 걸리면 퇴학입니다."

-조만간 돌아갈 텐데(홍 교수는 27일 미국으로 떠났다) 신학기 수업 계획은 어떻습니까?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커리큘럼은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현재 1학년, 4학년,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있는데 신학기에도 비슷할 겁니다. 다만 미국내 소도시에서는 아직 외국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습니다. 그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 '응용언어학' 과목을 준비 중입니다. 단순히 언어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와 융화된 영어교육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과목입니다. 수료증도 줄 계획이고요. 외국에 나가서 영어를 가르칠 학생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걸로 생각합니다. 다른 문화는 나쁜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죠."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 홍효창 교수는?=1970년 대구에서 태어났고 오성고, 영남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카투사로 군복무를 마친 뒤 1995년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미국 볼스테이트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2002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마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2003년 고대 영어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6년 부교수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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