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편지, 그 깊은 숲

"기체후일향만강하시오며 가내두루 무고하옵신지요." "염려지덕분으로 무탈하옵니다."

50, 60년대 어른들이 주고받던 상투적 서신 문투다. 오늘날의 언어습관으로는 너무 무거워 들어 올리지도 못할 '말씀'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기이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교 1학년이었던 지난 1961년도부터 내게 오는 모든 편지를 모으고 있다. 뭐,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버리지 않다보니 쌓였을 뿐이다. 다락에, 지하실에 묶어둔 이 편지들이 도대체 몇 통이나 될는지 나 자신도 모른다. 언제 한번 정리해본다는 것이 차일피일, 벌써 또 몇 년이 흘렀다.

그런데 이제 편지는 끝난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을 끈끈하게 엮어주던 재래식 '편지질'은 없다. 펜팔, 얼굴도 모르고 마음을 다해 깊어지던 연애편지도 이미 마감된 지 오래다. 전화라는 기계가 먼저 흑염소 떼의 먹성처럼 편지라는 야산 숲을 거의 전면 결딴내버렸다. 컴퓨터 E-메일이나 핸드폰 문자 메시지 등 '변종 편지'가 뜨지만, 그 기계가 찍어 보낸 말들은 즉석에서 휘발되고 만다. 기계의 소음들끼리 재빨리 놀고 내뺀 얼룩일 뿐. 하긴, 오는 편지가 있긴 있다. '필참 요망'식 '공문'이다. 편지는 이제 개인 간의 소통 수단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간의 무슨 일방통행 식 신호음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이른 아침, 조용한 주택가를 무차별 뒤흔들고 지나가는 행상트럭의 스피커소리 같은 것, 모으고 싶지 않은 편지엔 침묵이 없다.

문자의 발명과 함께 인간의 말은 비로소 단순한 소리에서 벗어나 태고의 침묵에 침묵으로 화답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침묵의 말, 편지. 인간의 문자는 인간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인터넷을 뒤져보면 편지의 고전은 많다. 안동의 한 옛무덤에서 수습된 4백20년 전의 긴 편지 한 장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서른한 살 젊은 아내의 애절한 망부가는 조선판 '사랑과 영혼'으로 불렸다. 그리고 신약성서에 나오는 요한의 편지와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와 죽기 직전까지 주고받은 편지, 카프카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등 사람은 이렇듯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물론, 원망과 저주로써 비극을 부른 편지도 많겠지만 편지의 원형은 어디까지나 '애정'이다.

나는 얼마 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새로 낸 시집을 보냈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해온 것. 어쩌면 지극히 의례적인 편지였지만 실로 오랜만에 받아보는 '육필'이었다.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식물 같았다. 16절한지에 만년필로, 미미하게 번지는 새파란 잉크로 한자 한자 참 단정하게 피워낸 글씨가 마침내, 눈 아래 한 판 빽빽하게 우거졌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우리나라 삼림, 그렇듯 무수히 점철된 엠보싱의 녹음 같았다.

그러고 보면 편지는 식물성이다. 편지라는 말엔 '풀잎'의 'ㅍ'발음이 새파랗다. 편지! 아닌 게 아니라 생풀냄새가 난다. 편지의 문자들은 풀잎, 나뭇잎처럼 소리 없이 말한다. 내가 모은 편지들을 다 펼치면 수 십만평에 달하는 숲이 될 것이다. 편지가 그린 숲, 그 숲의 말엔 소리가 없다. 그렇지만 분명 말하고 있다. 편지를 읽는 사람 또한 소리가 없다. 그렇지만 편지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행복에 잠기기까지 한다. 그리고 우선 마음으로 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침묵이 서로 말하는 것, 침묵과 침묵이 대화하는 것이 편지다.

땅이 생기고 그 땅에 가장 먼저 당도한, 묵묵히 솟아오른 숲. 숲은 지금까지도 소리가 없다. 그러나 숲엔 기차소리보다 요란한 계곡 물소리가 있고, 사이렌소리보다 긴 바람소리가 있다. 그런데 어째 숲엘 가면 시끄럽지 않은지, 그것은 숲의 안식과 평화를 믿기 때문이다. 숲은 말한다. 순전히 침묵으로써 말한다.

그러니까 숲의 자궁이 낳지 않은, 진정한 침묵을 거치지 않은 기계적 편지는 한낱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산업화 정보화 시대, 하기야 어느 시댄들 누가 무슨 힘으로 당대를 이겼겠는가. 사람들은 가끔 숲에 가고 싶거나, 숲에 갈 뿐이다.

문인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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