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감 후] 지방肝 서울肝

선배 한 분이 생각납니다. 애주가인 그는 지방간 판정을 받고도 술을 끊지 않았습니다. 술을 줄이라는 주변사람들의 권고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떱니다. "촌놈들인 너희들하고 술을 마시는 바람에 지방간이 생긴 거다. 앞으론 서울 사람하고 술을 마셔야지. 그럼 서울간이 되는 것 아니겠어?"

말에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화자에 따라 어감은 달라집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인의 뇌 속에 '지방'이라는 말은 하찮은 것, 후진 것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똬리를 틀었습니다. 지방대에 다니면 별 볼 일 없는 대학에 다니는 것이 됩니다. 연예인들도 서울 아닌 곳의 야간 업소에 다녀오고는 '지방 공연' 다녀왔다고들 합니다.

'촛불시위 중 여대생 사망설을 제기한 신문 광고를 실었던 김모(23·지방대 3년 휴학)씨가 모금액 일부를 안마 시술소 등 유흥비로 쓴 것으로 드러나면서….' 지난 5일자 한 중앙 일간지의 기사입니다. 대학 휴학생이라고 쓰면 될 것을 굳이 지방대라고 표현했더군요. 같은 날 다른 중앙 일간지가 쓴 사설에는 '이 사건은 지방지 기자 최모씨가 6월 2일 전경이 호흡곤란으로 쓰러져….'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냥 신문기자라 하면 될 것을 지방지 기자라고 한 연유는 무엇일까요.

스웨덴의 팝그룹 '아바'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The winner takes it all. The loser standing small, besides the victory. That's her destiny.'(승자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지. 패자는 그 옆에 초라하게 서 있어. 그것이 패자의 운명이야.)

주류가 판을 치고 99석 부자가 1석 빈자의 곳간을 넘보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의 사회구조 속에, 변방의 들러리는 서럽습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지방'도 대표적인 들러리 중 하나일 겁니다.

지방대 졸업장으로는 대기업 서류전형 통과조차 어렵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대기업 입성에 성공했다 치더라도 수도권 학연·지연이 없어 붙어있기가 힘듭니다. 부모는 서울 유학을 선택합니다. 사립대에 보내면 등록금과 생활비 합쳐 연간 2천만~3천만원이 듭니다. 비수도권 출신인 학생은 서울에서의 인맥이 제대로 없어 과외 일거리 찾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자식 서울 유학 보내는 부모는 등골이 다 빠집니다. 정작 자신의 미래를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찾아서, 배우자감을 찾아서 오늘도 많은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20~30년이 지나면 수도권을 제외한 국내 대부분의 지역은 농촌, 도시 할 것 없이 초고령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수도권이 너무 비대화됨으로 인해 국가 경쟁력의 비효율을 걱정해야 할 판입니다.

서울이라는 공룡은 재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가치관마저 블랙홀처럼 빨아들입니다. 모두들 '서울로!'를 외치고 수도권 우월주의에 중독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나라 어느 곳도 지방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대검찰청을 빼면 서울에 있는 검찰청도 지방검찰청입니다. 왜 서울만 '특별한' 곳이어야 할까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노무현 정부와 무조건 반대로 간다'는 '반노(反盧)이즘'이란 신조어가 등장했습니다. 국정 이념이 다른 것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적어도 참여정부의 지방균형발전 이념만은 승계했으면 합니다.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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