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그림 작품들은 의미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성경과 신화에 기초한 것이든, 사회상을 담은 것이든 간에 20세기 추상미술보다 훨씬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 혹은 인문학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럽의 중세 그림'은 매력적이다.
대체로 근대 이후의 그림은 중세의 그림에 비해 미적 완성도가 높고, 그림을 따로 공부하거나 미적 감각이 뛰어나지 않으면 충분히 즐기기 어렵다. 이에 반해 중세의 그림은 의미와 이야기에 많은 무게를 두고 있으니 찬찬히 뜯어보거나 배경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그렇다고 작품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유럽의 중세와 근대 그림을 구분하는 여러 기준 중에는 '화가의 사회적 위치'가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중세에 미적 기준을 설정한 사람은 예술가(화가)가 아니라 철학자와 신학자였다. 당시 그림은 철학이나 신학으로부터 독립한 하나의 장르로 존재할 수 없었다. 화가는 그저 장인이었을 뿐, 무슨 사상가로 대접받지는 않았다. 예술가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그림에 담아내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무렵부터였다. 따라서 유럽의 중세 그림은 화가의 '사상'이라기보다 당시의 철학이나 종교, 사회상을 많이 담았다. '중세 그림'에서 많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고, 당시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은이는 이 책 제목 '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에서 굳이 '가을'을 제목으로 넣은 이유를 "시대의 흥망을 사계절에 비유한다면, 가을에 이르러 비로소 숨겨놓았던 색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계절에 비유해 볼 때 중세는 '가을'에 맞추는 것이 가장 적확하다는 말이다. 가을이 왠지 을씨년스럽고 난감한 기분이 드는 계절이라면 유럽의 중세도 그 비슷한 분위기라는 말일 것이다.
지은이는 중세의 가을을 증언하는 대표 작품으로 피터르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를 지목한다. 이 작품은 낯설지 않은 작품인데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중세를 장대하면서도 끔찍하게 묘사하고 있다.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죽음의 승리'로 들어가 보자.
그림 가운데 앞쪽은 긴 낫을 들고 붉은 말을 탄 해골군단이 인간을 풀 베듯이 몰아서 십자가가 그려진 거대한 관 쪽으로 밀어 넣는 장면이다. 저 거대한 관은 잠시 사람을 가두는 '포로수용소'라기보다 죽음의 통 '가스실'을 연상케 한다. 관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모조리 죽임 당할 것임은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엎어져 있는 여인의 시체를 비쩍 마른 개가 뜯어먹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인간의 친구인 개가 그대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뜯어먹으리라'는 유명한 르네상스 비극의 대사를 연상시킨다. 문학작품들은 흔히 세상이 미쳐 날뛰는 날을 인간의 친구이자 시종인 개가 사람 고기를 먹는 날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닭은 더 이상 울지도 알을 낳지도 않고, 개는 주인인 사람을 위해 꼬리를 흔들거나 짖는 대신 사람 고기를 뜯는 것이다. 말세인 셈이다.
그림 오른쪽에서 세월 좋게 카드놀이를 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해골군대에 놀라 쩔쩔매고 있다. 붉은 옷을 입은 남자는 용감하게 칼을 뽑아 해골군대에 대적하려고 한다. 어디나 이런 지사형의 인물은 있다. 그러나 어떤 시대고 지사형의 인물이 당대의 거대한 물결에 맞서서 이기는 경우는 없다. 이긴다면 그는 지사가 아니라 '영웅'의 칭호를 얻을 것이다.
지사와 달리 테이블 밑으로 숨는 어릿광대도 보인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인물 역시 죽음을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와중에도 서로 몸을 포개고 악기를 연주하는 남녀도 보인다. 세상 모르고 즐기는 이들에게도 죽음은 임박했다. 그들 뒤에도 이미 악기를 든 해골군사가 도착해 있다.
눈을 조금 들어 그림 중간부분과 뒤쪽을 살펴보면 더욱 끔찍하다. 저 먼 곳은 이미 해골군대가 초토화시키며 건너온 땅이다. 사람들은 해골군대에 살해돼 강물로 던져지고 있다. 해골군대가 점령한 땅에는 불길이 솟고 있다. 그림 오른쪽 뒤편에는 한 남자가 십자가를 들고 꿇어앉아 해골군사로부터 참수당하고 있다. 그 옆에 붉은 바지를 입은 남자는 해골의 손아귀에 목줄을 붙들려 땅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중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해골의 손아귀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때때로 브뤼헐의 그림은 극도의 허무주의를 증언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죽음 앞에 모든 것은 무너지는 법이다'는 식의 이야기라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니까.
이 그림은 가톨릭교회가 자행했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학살을 암시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종종 티치아노가 그린 '뮐베르크 전투에서 프로테스탄트를 무찌르고 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쟁의 승리가 남긴 것이라면 끔찍한 '죽음'뿐이라는 점을 브뤼헐은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또 전쟁 자체에 대한 회의라는 분석도 있다.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허락하지 않으며 승리자는 오직 '죽음'뿐이라는 것이다. 질병이 창궐했던 탓에 중세인들이 '죽음'에 관해 독특한 관념을 가지게 됐음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중세인의 '죽음'과 '성애'에 대한 태도와 중세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지은이는 시종 도상학(시각예술에서 쓰인 상징이나 소재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학문)적으로 그림을 읽고 있는데 지은이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당시 사람들의 생생한 생활상과 생각을 접할 수 있다.
지은이는 그림 텍스트를 통해 '중세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중세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 질병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고 증언한다. 영화나 낭만적 소설에 등장하는 기사와 귀부인의 러브 스토리는 그야말로 우리시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로망'인 셈이다.
'보스에서 렘브란트까지 그림 속 중세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그림을 통해 중세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 예술서다. 중세의 모습을 엿보는 동시에 오늘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중세적 모습'을 확인하는 계기도 될 듯하다. 326쪽, 1만7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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