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옥관의 시와 함께] 처음을 앓는 여자 - 알츠하이머 / 최빈

처음이라는 말이

오래된 신발처럼 좋았다

맨질맨질 바닥이 다 닳을 때까지

처음이라고 고집을 부린 적 있다

천 명의 아이들이 느낄 법한 슬픔이*

처음의 밑바닥에 깜깜하게 붙어 있다는 걸

보게 된 날도 나는

처음이었다

지구의 둥근 자전이 끊임없이 나를

처음으로 옮겨 놓았다

언젠가는 정말 처음일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딸깍 끊어지는 전화소리를 들을 때나

돌아서기도 전에 철컥 대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을 때면 그랬다

처음을 의심하는 건 못된 습관이야

누군가 그렇게 말해 준 이후로 나는

날마다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슬픔을 맛볼 즈음엔

또 다른 사랑이 처음으로 왔다

한 처음을 생각하는 지금,

그 숱한 처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접두사 '첫'을 떠올려보자. 첫사랑, 첫날밤, 첫경험, 첫 출근, 첫나들이…… 수많은 '첫'의 연속이 인생이다. '처음'에 오는 것이 '다음'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다음이 없다. 죽음에 다음이 없듯이 인생에는 다음이 없다. 그 시간, 그 장소와 그 사람은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삶의 진실을 시인은 알츠하이머로 짚어내고 있다. 생각해보면 기억을 잃어버린 치매환자들은 '처음을 앓는' 사람. '그 숱한 처음들'을 잃어버리고 다시 처음을 앓는 사람들이다. 시인의 말을 흉내 내어 나도 중얼거려본다. 나를 설레게 만들었던 내 삶의 그 숱한 처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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