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비정하다. 지도자나 국민이 취한 선택에 냉혹하게 답해온 것이 인류역사다. 이 점에서 한국과 중국의 현대사는 전형적이다.
1948년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신생 사회주의국가가 나아갈 길로 극좌 모험주의를 택했다. 바로 1958년 시작된 대약진운동과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이어진 문화혁명이다. 사회주의 건설의 완성과 무산계급 문화의 창출을 목표로 한 이 실험은 엄청난 사회·경제적 손실을 초래한 채 실패로 끝났다.
같은 시기에 우리는 경제개발이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좌파는 이를 두고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경제블록으로의 흡수' '대외의존형 경제구조의 고착'이라고 폄하했지만 그 선택은 최빈국을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려놓았다. 문화혁명이 끝난 해인 1976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818달러)은 중국(164달러)의 5배였다. 시대가 준 기회를 움켜쥔 탁월한 선택이었다.
박병원 청와대 경제수석은 재정경제부 차관 재직시절 기자들과의 토론 자리에서 한국과 중국의 서로 다른 선택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국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마오가 문혁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현재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던 중국이 무섭게 일어나고 있다. 진시황의 철갑군단의 진격을 연상시키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의 위압적 물량전은 중화제국의 부활, 저들의 표현대로 '韜光養晦(도광양회:조용히 숨죽여 내실을 쌓는다)'를 끝낸 '■起(굴기:떨쳐 일어남)'의 선언이었다. 이를 두고 혹자는 아리안족 우수성의 선전장으로 전락했던 베를린 올림픽만큼이나 '정치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굴기에 내포된 의미는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중국은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强漢盛唐(강한성당), 중국역사상 최고의 강성대국이었던 한과 당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한과 당의 역사는 무력으로 주변을 끊임없이 복속시켜온 제국주의의 역사다. 이러한 중화 제국주의는 서구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됐던 19세기에 잠시 주춤했을 뿐 중국의 역사를 관통해 온 底流(저류)였다. 가장 최근의 예가 1949년 티베트 합병이다. 당시 미국은 동서 냉전이 熱戰(열전)으로 폭발한 한국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중국은 이 틈을 노리고 티베트를 삼켰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고통받아온 자신의 아픈 역사를 다른 나라에 재현한 것이다.
올림픽 이후 중국이 어떤 행로를 취할 것인가는 아직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强漢盛唐'이란 말에 '宗主(종주)'의식이 깊이 스며 있음을 느낀다. 고구려 역사를 자기역사로 둔갑시키고 있는 동북공정과 최근의 이어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에서 중화제국주의의 음험한 그늘을 본다. 그래서 우리 역사와 영토주권에 대한 침해 기도가 일본과는 차원이 다른, 직접적이고 위압적 양상을 띨 것이라는 불안감도 떨칠 수 없다. 중화주의로 무장한 13억 인구가 떨쳐 일어날 때 바로 이웃에 있는 우리는 그 후폭풍을 온몸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중화주의라는 폭풍을 받아낼 수 있는 체력이 없다. 좌파정권 10년 동안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 전쟁과 세대 간 지역 간 계층 간 분열·대립으로 국가의 기초체력은 바닥이 났다. 이러한 혼란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장을 열 것으로 기대됐던 보수정권도 국민의 힘을 한데 모으는 능력과 식견을 보여주지 못한 채 '촛불'이란 덫에 걸려 비틀거리고 있다. 실용주의는 철학 없는 무원칙으로 파탄을 맞았고 도덕성의 결여는 10%대의 지지율로 귀착됐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도, 돌파구를 열 국민적 역량을 모으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정권의 모습이다.
정치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일어난 반면 정치적 안정을 구가했던 스위스에서는 시계공업만 발달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이 르네상스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보수 정권은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의 굴기에 맞설 어떤 비책을 마련하고 있는가?
정경훈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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