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나면 오르는 물가에 폭염까지 겹쳐 올여름 서민들의 삶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삶에 지칠 땐 시장에 가보라는 말이 있다. 서민들의 삶의 현장인 재래시장 사람들은 어떻게 여름을 나고 있을까?
◆"추억 속에 돈이 있어요"=펑…펑…. 대구 번개시장 입구의 한 가게엔 한여름에도 뻥튀기 기계 5대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밤, 검정콩, 옥수수, 쌀, 보리 등을 튀기기 위한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장사를 한 지 23년이 됐다는 '아줌마 뻥튀기집' 주인 김옥년(55)씨는 "압력이 높은 재래식 뻥튀기 기계로 튀기면 볶거나 구울 때보다 맛이 훨씬 좋아 한번 온 사람은 또 찾는다"고 자랑한다.
날씨가 더울수록 구수한 옥수수차나 보리차를 끓이거나 건강식 미숫가루를 구입하기 위해 가게를 찾는 사람이 늘어 한낮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뻥튀기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전기회사에 다니다 그만두고 이 가게에서 장모님 일을 도와주고 있는 한진수(27)씨는 "어려울수록 추억의 맛을 찾는 단골고객이 많아 생각보다 수입이 괜찮은 편"이라며 앞으로 다른 시장에 '뻥튀기 체인점'을 낼 계획을 갖고 있다.
◆"시장은 제2의 고향이죠"=대구 북구 팔달신시장은 의성이나 안동 출신 상인들에게 제2의 고향이다. 의성상회 6곳, 의성당근, 의성양파, 의성식육점, 의성떡집 등 가게명에 의성이 들어가는 곳만 10여곳에 이른다. 배추, 무를 비롯해 버섯, 생선, 고춧가루 등 취급 품목도 다양하다.
이들은 시장내 의성향우회를 구성해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으며 의성군의 축제나 경로잔치 땐 후원금을 내는 등 고향을 돕기도 한다. 의성 출신 손님들이 팔달신시장에 올 경우 이들 가게를 자주 찾는다.
의성 춘산면 출신인 이정오 상인회장은 "고향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장은 장돌뱅이들이 흥정하며 다투는 살벌한 곳이 아니라 언제나 푸근하고 편안한 곳"이라고 말한다.
팔달신시장엔 안동상회 2곳, 새안동상회 2곳, 신안동상회, 안동양곡, 안동수산 등 안동이 들어간 가게도 7곳에 이른다.
대구 번개시장엔 청도쌀집, 청도 고디 감, 청도 과일 채소 등 나란히 붙은 가게 3곳에서 청도 출신 아줌마 3명이 오순도순 장사를 하고 있다. 이들은 가게를 비울 때나 배달 갈 때 물건을 팔아주며 '지것내것없이' 자매처럼 정을 나눈다.
◆"배추장사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죠"=칠성시장에서 채소가게 '금산상회'를 운영하는 김동목(55)씨는 매일 오전 2시에 일어나 대구시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배추, 무 등을 떼온다. 남보다 먼저 가야 신선하고 품질 좋은 채소를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가게에서 배추를 다듬어 판매하다 오전 11시경 또다시 농수산물 도매시장으로 간다. 역시 경매를 마친 신선도 높은 농산물을 구매하기 위해서다. 김씨는 상인들이 부지런하고 유통이 빠르기 때문에 재래시장 채소가 백화점이나 대형소매점보다 훨씬 더 싱싱하고 품질이 좋다고 한다.
◆"2천500원짜리 정식 시장의 명물 됐어요"=팔달신시장엔 상인들이 점심시간이면 거의 매일 이용하는 식당이 있다. 집밥처럼 담백하고 푸짐한 정식을 제공하는 '할매식당'이 그곳이다.
반찬도 구운 고등어, 고추조림, 열무나물, 버섯무침, 어묵, 멸치조림, 콩나물무침, 김치 등 8가지나 된다. 집에서 따로 담근 된장국은 기본이고 육개장 등 국도 따로 나온다. 밥은 선산 해평쌀로 지으며 반찬거리는 시장에서 구입한 신선한 우리농산물이다.
밥과 반찬이 푸짐하지만 가격은 작년 그대로 2천500원이다. 식당 주인 남춘식(73) 할머니는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서민들이고 상인들도 힘겹게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밥값을 올리지 않고 버틴다"고 말한다.
매월 첫째·셋째 일요일에 쉬고 멀리 성주나 달성 가창 우록 등지에서도 손님들이 오기에 피곤함을 이겨낸단다.
◆"재래시장에서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있어요"=대구 서문시장 아진상가 내 골목엔 규방공예의 전통을 이어가는 '한국매듭규방공예원'이란 공방이 있다.
이곳에선 현재 30여명의 수강생이 다양한 종류의 전통매듭을 배우고 있다. 더위도 잊은 채 끈 한가닥으로 까다롭고 복잡한 매듭을 만들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기 일쑤다. 전통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멀리 부산이나 경주, 구미 등에서 이곳까지 오기도 한다.
공방 주인 김종숙씨는 "예전엔 주로 한복에 섬세한 매듭으로 만든 노리개를 달아 아름다움을 더했지만 요즘엔 매듭을 현대감각에 맞게 응용해 다양한 생활소품이나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불황으로 보석단추 찾는 손님 되레 늘었어요"=서문시장 아진상가엔 단추가게 7곳이 성업중이다. 중국서 만든 의류 완제품의 대량 수입으로 대구 봉제공장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최근 동네마다 들어선 헌옷 수선집 덕분에 수요가 많이 늘었다.
계절마다 옷이 바뀌고 유행에 민감하기 때문에 단추의 종류는 수천 가지에 달한다. 가격도 한 개에 50원, 100원부터 5천원, 6천원까지 천차만별이다. 단추의 종류가 많은 만큼 재고도 많이 쌓이는 편이다.
하지만 큐빅이 들어간 보석단추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20대, 30대 여성들은 심플한 것을 선호하지만 40대 이상 아줌마들은 화려한 옷을 좋아해 큐빅단추를 많이 찾고 있다.
'이태리단추' 가게 주인 조용오씨는 "불황으로 주머니가 얇아진 아줌마들이 새옷 구입을 줄인 반면 예전 옷 리폼을 자주 하면서 보석단추 수요가 늘었다"고 말한다.
'아진단추' 가게를 운영하는 박윤희씨도 "최근 중국 봉제의류에 밀려 단추경기가 10년 전보다 못하지만 아줌마 단골손님이 늘면서 보석단추는 가공이 끝나자마자 금방 팔리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민병곤기자 min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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