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모래판의 전설' 이만기, TV서 바느질 한 사연은…

▲ 단단하기로 유명한 이만기씨의 종아리.
▲ 단단하기로 유명한 이만기씨의 종아리.

천하장사 이만기(45). 모래판 위에 선 이만기는 누구도 쉽게 꺾을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1991년 은퇴하기 전까지 그가 올린 승률은 무려 84.6%에 이른다. 하지만 요즘 그의 미니홈피 방명록은 어린 청소년들이 남긴 글들로 가득하다. 대부분 "요즘 TV 잘 보고 있어요"라는 내용이다. 한국 씨름의 상징이 받는 대접치고는 꽤 어색하다. 12일 오후 경남 김해시 인제대에서 이만기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운명'을 강조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도회지로 오고, 씨름에 입문해 모래판을 호령하기까지 모두 잘 짜여진 드라마 같았다"고 했다.

◆씨름을 위해 카메라 앞으로

-최근 들어 방송 출연이 잦던데요.

"KBS '스펀지 2.0' '비타민' 등 3개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고 있고요. 다른 프로그램은 게스트로 한번씩 출연해요. 40, 50대가 나와서 구수한 입담이나 인생 얘기를 하니까 더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아요."

-방송에 자주 출연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만기 하면 '씨름'이고 제 앞의 수식어가 늘 '천하장사'잖아요. 지금은 씨름이 침체돼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꽃이 필 날이 올 거라고 믿고 그때까지라도 씨름이라는 단어가 국민들 속에, 어린이들 속에 기억이 되도록 하려는 거죠. 그게 천하장사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끼가 있으신 건가요?

"끼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얘기를 있는 그대로 하는 거죠. 방송에서 바느질도 하고 오이를 썰기도 하는데. 어릴 때부터 자취를 했잖아요. 대학 시절 훈련할 때도 직접 밥을 지어 먹었고. 두 아이가 모두 외국에 나가 있어서 혼자 생활을 하는데 집에서 다른 물건에는 손을 안 대요. 딱 동선이 있잖아. 방에 착 들어가서 목욕탕, 침대. 다른 건 안 건드려요. 치워야 되니까.(웃음이 터졌다.) 이런 사는 얘기 하는 거예요. 그럼 웃잖아."

◆씨름은 내 운명

-어릴 때 마산으로 유학을 오셨죠?(그의 고향은 경남 의령이다.)

"당시만 해도 도시로 학교를 보낸다는 게 외국 유학에 버금갈 정도로 생각을 못 할 때였어요. 그런데 형님이 시골보다는 큰 물에서 공부하면 좋겠다고 해서 초등학교 4학년 때 동갑내기 조카랑 둘이 마산으로 유학을 왔어요."

-형님하고 나이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나네요?

"제가 5남 2녀 중 막냅니다. 큰 형님과 30년 가까이 나이 차가 나는데 아버지가 마흔넷에 저를 낳으셨죠. 어머니가 며느리보다 애를 늦게 낳게 된 걸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럽게 생각하셨대요. 그래서 저를 안 낳으려고 온갖 애를 쓰셨어요. 산에 가서 굴러도 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보고, 온갖 민간 요법도 다 해보고."

-마산에 오자마자 샅바를 잡기 시작한 건가요?

"제가 전학을 왔을 때 특별활동부에 들어가게 됐는데 마침 씨름부에 인원이 모자랐어요. 그때는 축구 인기가 대단할 때여서 축구부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씨름부에 넣어주시더라고. 마침 그해부터 씨름이 소년체전 정식종목으로 채택이 됐어요. 천하장사가 되기 전까지는 개인전에서 한번도 1등을 못해봤어요. 천하장사 대회가 '이만기를 위해 만들어진 대회'라고 하잖아요. 내가 왜 씨름을 하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참 '운명'인 것 같아요."

-그 전까지 왜 개인전 우승을 못했을까요? 잠재 능력이 발휘가 안 된 건가요?

"제 능력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 같아요. 제가 중학교 진학할 때만 해도 체격이 굉장히 작았어요. 중1 때 키순서대로 번호를 받는데 65명 중에서 8번이었어요. 그런데 중2 때부터 고2까지 1년에 몸무게는 10㎏, 키는 10㎝씩 컸어요. 그래서 체격이 작을 때는 파고들어가는 잔씨름을 하다가 덩치가 커져서 드는 씨름, 큰 씨름을 하게 됐죠. 그러니 제가 기술의 폭이 엄청나게 넓어진 거죠. 그게 천하장사를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죠."

◆스물여섯, 이만기는 최고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언제입니까?

"제1대 천하장사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전날 한라장사는 2위를 했는데 천하장사 대회는 8강만 들어가도 잘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8강에 오르고 4강까지 갔는데 이준희 선배를 만난 거예요. 그때 준희형한테 한 판 이겨보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그날 준희형을 이긴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 거의 기적이었으니까. 결승에서는 최욱진 장사가 올라왔는데 2대 2까지 갔어요. 마지막 판인데 그때 쓴 기술이 호미걸이예요. 그런데 호미걸이는 제가 평소에 쓰던 기술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왜 보였을까. 딱 걸었는데 야무지게 걸렸어."

-대회에서 우승해서 받은 상금은 어디에 썼나요?

"1대 천하장사 대회를 하고 상금을 1천700만원을 벌었어요. 엄청나게 큰돈이었죠. 불로소득이라고 세금을 33% 떼고 나니까 1천200만원이 남더라고. 200만원을 여기저기 용돈을 드리고, 감독님이 500만원을 떼서 훈련비로 쓰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손에 쥔 돈이 500만원이에요. 사실 그 뒤로도 상금을 받으면 세금 떼고 남은 돈의 반은 학교에 내고, 반만 가져갔어요. 고향 가서 잔치하고 여기저기 도와드리니까 손에 남은 게 없어. 그해 CF도 찍고 다른 대회 우승도 해서 총 소득이 7천만원이었는데 누진세가 붙으면서 세금이 1천500만원이 나온 거예요. 내 손에 쥔 건 없는데. 그래서 학교에 기부한 걸 인정해달랬더니 5%밖에 인정이 안 된대요. 결국에 씨름 못하겠다고 했더니 세미 프로로 인정하고 세금을 1%로 낮춰줬어요. 그래서 제가 1984년, 85년에 종합소득세 1위로 두 번 냈습니다. 조용필씨도 저보다 적게 냈어요."

-현역 시절에 징크스가 있었습니까?

"저는 목욕을 하지 않고 시합에 들어갔어요. 샤워를 하면 근육이 풀어져서 힘을 못 썼거든요. 미신은 말도 못 했죠. 샅바는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고 머리도 안 깎고, 욕도 안 먹어야 하고, 미역국이나 계란 안 먹는 건 필수고. 신발도 거꾸로 신으면 안 되고 옷이나 이불도 누가 밟으면 안 되고 그랬죠."

-요즘 한 인삼 광고에 스물여섯살 이만기와 한판 붙는 내용이 나오던데 정말 지금 붙어도 이길 수 있을까요?

"말도 안 되는 거죠. 현역 시절에는 대단했어요. 체격은 작았지만 빨랐고 한번 약점을 포착하면 저돌적으로 공격했어요. 7, 8가지 수를 생각하고 들어갔으니까. 당시에 선배들은 문제가 없었는데 후배들이 어려웠어요. 제 위로 준희형이 7년 선배이고, 강호동이 7년 후배니까 14년을 제가 잡아먹었잖아요. 위에는 겁이 안 나는데 신인 선수는 장·단점을 모르니까 상대하기 힘들었죠."

-현역 당시와 지금 몸이 차이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 천하장사를 할 때 92㎏이었고, 은퇴할 때 107~108㎏이 나갔는데 지금도 비슷합니다. 운동을 많이 하죠. 오전에는 산악자전거를 타고, 오후에는 배드민턴을 치고. 음식 조절도 늘 합니다. 배드민턴은 거의 선수들하고 같이 치는 수준이죠."

◆씨름은 다시 부활한다

-씨름이 이대로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씨름은 또 나옵니다. 5천년 씨름의 역사가 말해줍니다. 씨름은 우리 정서와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씨름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씨름하자고 하면 일단 허리띠를 잡아요. 그렇게 우리 문화 속에는 씨름이 있기 때문에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씨름이 쇠락한 가장 큰 원인은 뭘까요.

"복합적인데요. 변화하지 못했던 거죠. 또 우리 씨름이 너무 잘 나가다 보니까 미래에 대한 대비 없이 너무 안일했다는 겁니다. 철저한 분석과 마케팅 전략이 없었다는 의미이고. 씨름인들의 대형화와 기술 부족도 원인입니다. 선수들이 살을 찌우고 비대해지니까 기술을 할 수가 없어요. 자기 몸 가누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다리를 들고 기술을 넣습니까. 결국 사람들이 식상해 하죠."

-2006년에 한국씨름연맹에서 영구제명 조치를 당했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됐습니까?(2006년 한국씨름연맹은 그가 허위 사실을 유포하며 연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영구 제명했다.)

"그대로죠. 씨름연맹이 거의 없어졌으니까. 사실 그게 제명한 것도 아니에요. 발표만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전화를 해봤어요. 제명인지 아닌지 결정을 해달라. 그런데 결정을 못 한대요. 사람이 아무도 없대요. 얼마나 나쁜 사람들입니까. 자기들은 그냥 가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민족 문화의 뿌리를 흔들어놓고, 자기들 머리로 말살을 시킨 죄는 어떻게 할 겁니까."(격분한 그가 거친 말을 쏟아냈다.)

-일본 스모는 국민 스포츠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벤치마킹할 점은 없을까요?

"우선 국가 브랜드로 가야 해요. 스모는 정부의 국책사업으로 전폭적 지원을 받고 문화상품 브랜드가 됐습니다. 그동안 행정이 문제가 돼서 씨름이 쇠락한 거지 문화적인 차원에서 씨름은 재미있고 국민이 좋아하는 스포츠입니다. 5천년 역사를 가진 씨름인데 이 역사를 문화가 아닌 단지 놀이로 넘기면 안 되거든요. 우리 정부도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어요."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이만기는 누구?

1963년 경남 의령 출생. 1983년 제1대 천하장사대회는 '전설'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크지 않은 체격에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며 거구의 상대를 쓰러뜨리는 광경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만가지 기술을 가지고 있어 만기'라는 진담 같은 농담이 떠돌았을 정도. 그는 1983년부터 1991년 은퇴 전까지 천하장사 10회, 백두장사 18회, 한라장사 7회라는 깨지지 않을 기록을 세웠다. 이후 인제대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방송에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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