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천연색' '100% 동시녹음' '동남아 올로케' 등이 들어간 70년대 영화 포스터들을 기억하는가.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램브란트의 45도를 뛰어넘어 60도 상향된 쏠 듯한 눈빛과 각오로 태양빛을 받고 있고, 양각된 거대한 제목이 아래를 버티고 있다. 감독이면 '거장'이고, 배우면 '명우'이고, '에로티시즘' '카니발리즘' 등 모호한 '이즘'이 남발된 과잉의 극치를 치달았다. 요즘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당시에는 대유행이었다.
너무 유치하면 찬란해지는가.
류승완 감독의 신작 '다찌마와 리'가 그렇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는 1960, 1970년대 만주와 일본, 상하이를 무대로 펼치는 첩보 어드벤처물을 21세기형으로 복각한 퓨전 코미디영화다. 지난 2000년 인터넷을 달군 류승완 감독의 단편을 35㎜ 극장용으로 확장 업그레이드된 영화다.
인터넷 단편이 경성을 무대로 한 협객물이었다면, 이번에는 70년대 한국형 007로 전 세계를 뒤흔든다.
때는 1940년. 일제가 독립군 명단이 든 금동불상을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 된 가운데 여성 비밀요원 금연자(공효진)가 작전 수행 중 사라진다. "할 수 없지. 그를 쓸 수밖에" 임시정부의 비밀 병기가 투입된다. 그가 바로 최정예 비밀요원 다찌마와 리(임원희). 그는 최고의 무기 개발자 남박사를 통해 신형 무기를 지원받고 첩보계의 '검은 꽃'이라 불리는 관능적 스파이 '마리'(박시연)를 새로운 파트너로 맞이한다.
발군의 실력과 호탕한 기질의 그는 이제 상하이, 미국, 만주, 스위스 등 세계 전역을 넘나들며 전격 첩보전을 펼치기 시작한다.
'100% 후시 녹음'을 강조하는 '다찌마와 리'의 첫 번째 맛은 오디오다. 아예 드러내놓고 과거의 향수어린 한국 B급영화(당시에는 A급영화였다)를 비꼬고, 비틀어 웃음으로 뽑아낸다.
'나는' '그것은' 등 주어와 동사가 완벽하게 포함된 문장에 형용사와 부사를 과도하게 넣은 문어체 대사는 어설픈 비장미의 백미다."당신 마음의 세입자가 되고 싶소", "조국과 사랑을 배신한 넌 간통죄야" 등 신파조 대사는 거의 폭탄 수준이다. 한국어와 '짬뽕'된 엉터리 외국어는 얼마나 정교한지, 한참 지나서야 '저것 한국말이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흑룡강변에서 임시정부 고위인사 둘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비밀요원의 활약을 4자성어로 논박하는 장면 또한 잔재미를 준다.
만주벌판을 영종도로, 알프스는 용평스키장에서 촬영한 '100% 국내 올로케' 또한 뻔뻔스러움의 극치다. 흑룡강변의 처연한 모습은 성수대교 밑에서 촬영했는데, 그 위로 차들이 쌩쌩 달린다.
류승완 감독은 아예 작정하고 B급 정서를 총천연색으로 화려하게 채색하고 있다.
'첫 자막이라 예쁘게 봐 주세요' 라던가 '너무 빨라 번역이 안되네요'는 등 최근 다운로드동영상 자막의 행태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는 등 디지털 시대의 풍속도까지 담았다.
액션은 역시 '류승완 표'다. 만주벌판에서 다찌마와 리가 마적단과 싸우는 장면이나 상하이에서 펼치는 액션은 류승완이 그동안 보여준 '액숀'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임원희는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다찌마와 리를 연기하고, 류승범은 '국경 삵쾡이'로 나와 개성 강한 연기를 보여준다. 공효진, 박시연 등도 1970년대 여배우들의 어색한 연기가 제법 어울린다.
마리가 비행기 프로펠러에 휘말리는 장면 등 몇 장면은 할리우드 ZAZ 팀이 보여준 일명 패러디 영화의 맛을 풍기기도 한다. ZAZ는 '총알탄 사나이'의 데이비드 주커와 각본을 맡은 그의 형 제리 주커('사랑과 영혼'의 감독이기도 하다), '못말리는 비행사'의 짐 에이브럼즈 감독의 이름을 딴 말이다. 할리우드 유명영화들을 패러디하기로 유명한 이들이다.
그러나 '다찌마와 리'는 완전히 한국형으로 육화(肉化)된 코미디다.
'패러디 영화'들이 빅히트 영화를 '짜깁기' 하는데 그쳤다면, '다찌마와 리'는 그 정서를 통째로 옮겨와 2008년 현재형에 얹었다. 30, 40년의 시간차가 웃음으로 재창조된 진정한 의미의 패러디가 아닐까.
최근 할리우드에서도 B급 영화에 대한 향수를 현대화한 작품들이 있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플래닛 테러' 등이다. 끊임없이 '비'(필름의 긁힌 자국)가 내리고, 포커스가 나가고, 화면이 끊겼다가 심지어 '미안하다'는 자막까지 나오는 등 극장 안에서 벌어지는 사고를 최근 필름에 옮겨놓았다.
우리 영화에서도 이런 키치 스타일이 먹힌다는 것이 놀랍다. 그것은 류승완이란 한국영화의 '기인 감독'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만드는 영화마다 '제대로 된' 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열정을 온통 스크린에 뿌렸었다.
싸구려 냄새 진동하는 '다찌마와 리', 그것은 그의 또 다른 열정의 냄새이고, 그 냄새가 한없이 반갑다. 99분. 12세 관람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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