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꺼풀 벗겨본 조선왕조 인물들

살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며/윤용철 지음/말·글빛냄 펴냄

연산군 관련 이야기를 담은 영화
연산군 관련 이야기를 담은 영화 '왕의 남자'의 한 장면.

'살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며'는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졸기(卒記)'를 바탕으로 씌어진 책이다. '졸기'란 한 인물이 사망했을 때 사관(史官)이 그의 인적사항, 출생과 죽음, 성장과정, 학문의 정도, 벼슬살이의 과정, 인물 됨됨이, 평생의 업적, 저서, 후손 등을 자세히 밝힌 기록물이다. 요즘으로 치면 '추모록' 정도로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 시대까지 유명한 인물 2천125명에 대한 졸기를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중에서 23인을 선정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 잘못 알려진 내용을 파헤치고 있다.

▶ 변계량(1369-1430)=고려말에서 조선초의 문신으로 진덕박사, 사헌부시사, 성균관 학정, 예문관제학,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내해 죠타하고 남 슬흔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 의 아니면 좇지 말며/우리는 천성을 지키어 섬긴 대로 하리라'(청구영언, 해동가)를 지은 인물이다.

의와 지조를 지키고 바르게 살아가고자 했던 그도 숨기고 싶은 사연이 있었다. 실록은 '변계량의 누이가 여러 남자와 난잡한 관계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이의 난잡한 관계로 고통 겪었던 변계량 역시 처신에 문제가 많았다.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철원 부사 권총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버리고 또 오씨에게 장가들었다가 죽고, 또 이촌의 딸에게 장가들어 몇 달 만에 버리고 또 도총제 박언충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야사 '용재총화'는 변계량의 성품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변변치 않은 물건이라도 잘라먹은 뒤에는 자른 자리에 표시를 했으며, 손님을 대하여 술을 마실 때는 그 잔 수를 계산하고, 술병을 단단히 봉하니 손님들이 그 인색한 얼굴빛을 보고 자리를 뜨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세종이 그의 문장을 중하게 여겨 하사하는 음식물이 많고 재상들도 앞 다투어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방안에 쌓아두고 날짜가 오래되어 구더기가 생기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썩으면 버리면서도 하인들에게는 한 방울도 먹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대에 좋은 시로만 전해지는 변계량이 실제로는 매우 인색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 황희(1363-1452)=황희는 고려말에서 조선초 문인으로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했다.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등 업적을 남겼다. 세종의 깊은 신임을 받았던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실록은 '그는 신중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풍후 넓고 깊은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하여 대체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황희는 청렴의 대명사이나 청빈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는 세종으로부터 재상급 수준의 과전을 받았고,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에 흩어져 사는 노비도 많았다. (그렇다고 그의 생활이 사치스러웠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부유했지만 검소한 삶을 살았다.) 또 가정도 평화롭지 못해 곤경을 겪었다. 처의 형제인 양수와 양치가 법을 어긴 것이 발각되자 헛소문이라고 글을 올려 변명했다. 또 박포(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지만 대접이 박하자 불만을 품고 이방간을 충동질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처형됐다)의 아내가 종과 간통하고 그 사실이 우두머리 종에게 발각되자 우두머리를 죽이고 달아났는데, 황희는 자신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박포의 아내를 여러 해 동안 숨어 살게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임숭재(?-1505)=연산군 때의 신하. 그는 갑자사화를 일으킨 임사홍의 아들로 성종의 딸 혜신옹주와 결혼했다. 연산의 채홍사(採紅使)로 일했다. 중종반정으로 아버지 임사홍은 부관참시 당했고, 임숭재는 처이자 성종의 후궁 소생인 혜신옹주 덕분에 부관참시를 면하고 다만 묘에 세워진 석물만 제거당했다.

색을 좋아하는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는 데 숭재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는 춤과 노래를 잘했으며,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훗날 숭재가 죽고 나서 연산군이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숭재는 아무리 술을 마시라 해도 한사코 거부했으니 이는 왕명을 거부한 것일 수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술에 취한 모습을 임금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예의바른 신하였다'고 회고했다.

'졸기'는 '숭재가 이미 시집간 누이동생을 연산군과 시침하게 했으며, 왕은 숭재의 처인 옹주까지 아울러 간통했다. 숭재의 처는 바로 연산군의 누이이기도 했으니 연산군과 숭재의 인간됨이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연산은 숭재의 처를 간통하고 노비 15명을 하사했으며, 숭재는 집 사면에 있는 인가 40여 채를 헐어내고 담을 쌓아 창덕궁과 맞닿게 하여 밤이며 왕이 숭재의 집을 드나들며 음행하도록 했다. 연산군은 숭재에 대한 보답으로 이봉의 첩 내은이라는 여자를 빼앗아 첩으로 하사했다'고 밝히고 있다.

숭재는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게 된다. 연산군은 숭재가 병들어 괴로워한다는 말을 듣고, 중사(궁에서 심부름 하는 내시)를 보내 할 말이 무엇인가 물었다. 숭재는 대답하기를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다만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이 유한입니다.'라고 했다. 숭재는 역사와 국가에 다시없는 간신이었지만 색을 좋아했던 연산군에게는 두 번 다시 발굴하기 힘든 충신이었다.

이들을 포함해 책에는 맹사성, 이언적, 김상헌, 성삼문, 신숙주, 한명회, 정철, 이순지, 홍윤성, 이이첨, 윤원형, 허균, 김만중, 강희안, 이황, 김종직, 이색, 정도전, 길재, 조준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 23명이 등장한다. 대부분 벼슬을 한 관리, 무인, 문인, 학자들이다.

지은이는 등장인물들을 객관적으로 살피기 위해 '졸기'와 더불어 '탄핵 상소문'까지 두루 살피고 있다. 탄핵 상소문은 개인의 잘못을 묻기 위한 것인 만큼 개인에 대한 비난일 수 있다. 그러나 탄핵 상소문은 개인의 삶과 인격, 나아가 그 인물에 대한 당시 여론을 짐작하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다.

지은이는 '비록 탄핵 상소문이 한 인물의 과(過)를 묻는 것이기는 하지만 한 시대를 책임졌던 유명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공보다는 과에 대해 세밀한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 또 과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탄핵상소문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우리나라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에 대한 '청문회'라고 볼 수 있다. 310쪽, 1만2천5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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