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을 연 대구 도심의 한 음식점은 지은 지 80년 남짓 된 한옥이다. 타계한 어느 기업가의 본가였다는데 번잡한 동성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스러운 느낌의 대문과 중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뜨락 한켠에는 묵은 장독들 곁으로 머위, 호박, 뚱딴지 같은 '촌스러운' 식물들이 자리 잡고 있고, 돌담장 위로는 조롱박 덩굴이 기어가고 있다.
하나같이 정겹고 편안한 풍경들이다. 낯익은 풍경에 분주했던 마음은 어느새 여유로워진다.
한옥을 보기 어려운 시절이 됐다. 아니, 단독주택 자체가 드물어졌다. 사방을 둘러봐도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뿐이다. 요즘엔 재개발의 이름으로 동네가 통째로 자취를 감추는 일도 흔하다. 지붕 낮은 집들이 한꺼번에 밀려난 곳엔 아파트 단지들이 공룡처럼 서있다. 더구나 농촌의 들판 한복판에 우뚝 고층 아파트가 솟아 있는 풍경은 생경스럽기 그지없다. 이러다간 우리나라 전역이 아파트로 뒤덮이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작고 낮은 집들이 빠르게 사라져간다는 것. 별 일 아닌 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단독 주택들은 고급스럽든 촌스럽든 모양새부터가 각양각색이다. 국화빵을 찍어낸 듯 획일적인 아파트와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모름지기 사람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흙과 꽃'나무가 있는 열린 공간에서 사는 것과 사방이 닫힌 폐쇄적인 공간에서 사는 것은 일상적 사고와 행동, 감성과 상상력 등에서 차이 날 수밖에 없다.
주택가가 사라진다는 건 또한 골목길이 사라져감을 의미한다. 시인 김춘수가 그의 시 '토레도 소견'에서 노래했던 '꼬부라진 좁다란 골목길'들을 더 이상 보기 어렵게 된다는 얘기다.
요즘 중국 베이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올림픽을 맞아 전 세계에 현대화된 중국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에 전통가옥들과 골목길을 싸그리 없애버리는 모습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고도 베이징의 진짜 멋은 마천루 같은 빌딩숲이 아니라 라오베이징(老北京:베이징 토박이)들이 복닥대며 살아가는 후퉁(胡同:골목길)과 네모 반듯한 형태의 전통 가옥인 쓰허웬(四合院)이 밀집한 동네에서 찾을 수 있다.
그곳 주택가 곳곳에서 실핏줄처럼 이어진 후퉁은 元代(원대)의 문학 양식인 元曲(원곡:원의 잡극)에 그 명칭이 언급됐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다. 대략 800여 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후퉁은 중국 전통 가옥의 독특한 건물구조와 정원, 오래된 고목, 민초들의 질박한 삶이 어우러져 가장 베이징다운 풍경을 일궈내는 곳이다. 비록 기나긴 풍상 속에 낡고 지저분한 곳도 많지만 고색창연한 집 하나마다 골목 한귀퉁이마다 세월의 더께가 정겹게 녹아있다. 외국 관광객들에게 후퉁 관광은 가장 중국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투어로 인기 높다.
그런데 개발지상주의에 빠진 중국 당국은 이것들을 불도저로 사정없이 밀어내고 수십 층의 현대식 빌딩을 쌓고 있다. 이미 그들은 1950년대 초반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한다는 명목으로 베이징 도심을 둘러싼 각종 성벽을 파괴해 버린 전력도 있는 터다. 의식 있는 학자들과 일부 언론이 '재난'으로까지 표현하며 수백, 수천 채의 공장으로도 벌어들일 수 없는 돈을 가져다 줄 관광자원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지만 마이동풍이다. 값진 보석은 비록 질그릇 속에 담겨 있을지라도 아름다운 빛을 발하기 마련임에도 말이다.
우리네 주택가의 작은 집들과 골목길들은 중국의 후퉁만큼 고색창연하다거나 역사적 체취가 물씬 풍겨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역사나 사연이 스며있다. 얼마 전부터 대구 중구청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도심의 골목길 역사를 되새기는 '도심문화탐방 골목 투어'를 시작했다. 3'1만세운동길, 이상화'서상돈 고택, 성밖 골목, 약령시, 진골목 등을 돌아보는 1.7㎞ 투어다. 이런 의미 있는 시도가 확대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은 집들과 골목들이 더 이상 개발논리에 밀려 사라지지 않았으면 싶다. 세월의 殘香(잔향)은 아무 데서나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全敬玉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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