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한민국은 지금… '자뻑 전성시대'

스스로에게 반했다는 의미의 '자뻑'이 대세로 등장했다. 자기PR, 자기만족, 자아도취 등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지만 의미상 '자뻑'은 보다 강한 느낌을 준다. 너무 잘난 나머지 자신에게 '뿅 갔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가수들도 저마다의 매력을 내세우며 '내가 지상 최고'라며 노래 가사를 통해 치켜세우기 바쁘다. 세대가 바뀌어서인지 그런 노랫말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사라졌다. '난 너무 예쁘고 매력 있다'고 외치는 요즘 세대들은 더 이상 스스로를 낮추거나 껍질 속에 갇혀 있으려 하지 않는다. '자뻑 세대'의 등장은 자신감의 충만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저 잘난 맛에 빠져들어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이상 증세를 동반할 수도 있다.

◆'자뻑송'의 시대상

최근 대중가요 가사가 많이 바뀌었다.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남자를 기다리거나 떠난 남자의 등을 쳐다보며 괴로워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갈 테면 가라'고 외치면서 '세상에 남자가 너뿐이냐?'고 나름대로 허세를 떠는 것도 얼핏 자신감이 넘쳐 보이지만 어쨌든 이성과의 결별을 전제로 깔고 있다. 최근 대세는 다르다. '내가 너무 예쁘고 잘났기 때문에 너는 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라는 초강력 '자뻑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다. 물론 예전에도 이런 노래들은 있었다. 김자옥이 노래한 '공주는 외로워', 주주클럽의 '공주병' 등이 있었지만 '내가 잘났다고 해도 미워하지 말아줘'라는 다소 애교스럽고 수동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텔미'에 이어 두번째 싱글 히트곡 '소 핫'(So hot)을 내세운 원더걸스는 내놓고 자기가 예쁘고 매력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너무 잘난 자신 때문에 피곤해진다고 하소연한다. 이쯤 되면 비호감이라고 욕할 의욕마저 사라진다. 저렇게 잘났다고 굳게 믿고 있는데 굳이 그게 아니라고 얘기해 본들 무슨 소용이랴. 물론 원더걸스쯤 되니까 그런 노래를 거부감 없이 들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원더걸스 리더 선예는 "차마 겉으로는 이야기 못해도 사춘기 시절 거울을 보면서 누구나 자기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심리를 담았다.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과장되게 표현했지만 메시지는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를 더욱 사랑하자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최근 정규 3집 앨범을 발표한 가수 이효리도 마찬가지다. 첫번째 곡 '천하무적 이효리'라는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어딜 넘보려 하니/누구나 할 수가 있었다면 그건 내가 아닌 걸/쉬워보였겠지 잠깐은/내가 없는 무대였으니/다시 나를 보니 어떤지/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니까/내 자리이니까.' 아예 범접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철저한 '자뻑' 정신으로 똘똘 뭉쳐있다.

솔로 미니앨범을 발표한 쥬얼리 멤버 서인영도 같은 맥락이다. 드러내놓고 신상품을 좋아한다고 광고하는 바람에 '신상녀'라는 별칭까지 붙은 그녀는 타이틀 곡 '신데렐라'에서 '자뻑의 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요즘엔 내가 대세'라며 후렴구를 통해 수차례 반복하는 것도 모자라서 '넋이 나간 녀석들은 침을 흘리고 아주 웃기고 하하하하'라며 자아도취의 최고봉임을 과시했다.

자뻑의 인기는 젊은이들의 '세대 정신'과도 맥이 닿아 있다. 우스개로 '자뻑'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자기애 또는 자기 긍정이라는 뜻이다. 긍정적 의미의 자아도취도 될 수 있다. 예전에는 "나 잘났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을 정신 나간 얼간이쯤으로 치부했다면 요즘 들어서는 "그래 너 잘났어. 그런데 나도 잘났어"라는 반응으로 바뀌었다. 네가 소중한 만큼 나도 소중하다는 뜻이고, 이런 이유로 내 권리와 이익이 침해당하는 데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때문에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당할 때 '자뻑 세대'는, 그 수단이 군홧발이나 총검이 아니어도 독재이자 폭력이라고 받아들인다.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규범에 대해 어찌 보면 철없고 당돌할 정도로 아니 건방지고 버릇없을 만큼 '왜?'라며 따지고 든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에 촛불집회로 대응하면서 이들은 말한다. "왜 안전도 보장되지 않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는데?" 국제 정세와 대미 관계를 고려한 결정이라는 답에 대해 다시 묻는다. "왜 미국 눈치를 봐야 하는데?"라고. 과거에는 "아직 너희들은 어려서 모르니까 어른들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라는 준엄한 꾸짖음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라고 답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성세대만큼 '우리'도 똑똑하고 잘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히려 기성세대를 '자뻑'으로 규정한다.

◆적당하면 약, 심하면 욕

자뻑이 심해지면 독이 된다. 바로 교만이다. 잘나서 잘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난 '척'을 하는 것이다. 단지 척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과 같은 레벨에 오르지 못한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고 때로는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기도 한다.

최태진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정신적으로 가장 건강한 상태는 '속으로 꽉 차 있는 궁극적인 자존심'을 말하는데, 현재의 자뻑 증상이 겉과 속이 일치돼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며 "다만 이런 현상이 자신이 정말 잘났거나 예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부족함을 만회하기 위한 거짓 자신감일 가능성도 크고, 이것이 심해질 경우 '자기애적 성격장애'라는 병적 증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의 못난 부분을 덮기 위한 일종의 방어막처럼 '자뻑'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

심한 자뻑은 자칫 파멸로 이어지는 독이지만 적당하면 자신감을 북돋우는 약이 된다. 세상 모든 이성들이 자기만 보면 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병적인 증세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못생기고 매력도 없는 '찌질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박세리 선수의 아버지는 시합을 하러 새벽에 나가는 딸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세리야, 우리 지금 뭐 하러 가는 거지?" 그러면 박세리는 "물론 우승하러 가지요"라고 답하는 습관이 있다고. 실제 우승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최소한 그런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직장인 김현욱(37)씨는 "출근 전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참 잘났다. 역시 너는 멋진 놈이야'라고 스스로에게 한마디 던진다"며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화장실 거울을 보며 한번 씨익 웃어주면 힘이 솟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비록 유행가를 따라할지언정 '난 너무 매력있어 ♬'라고 흥얼거리는 순간 실제로 그런 느낌을 받게된다. 주부 조명은(42)씨는 "일부러 원더걸스나 이효리의 최신 노래를 인터넷에서 배우고 있다"며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서 따라 부르기도 쉽고, 게다가 부르면서 최소한 자기 만족감이 들기 때문에 좋다"고 했다. 하기야 '넌 너무 못생겼어'라고 욕하는 게 아닌 다음에야 무슨 상관이랴.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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