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저자와 대화] 시인이며 화가 백미혜

색채에서 詩의 영감, 詩는 또 그림이 되고…

백미혜의 시집 '에로스의 반지'를 두고 한 평론가는 '성행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을 추한 육체적 동작으로 떨구지 않는'다고 말한다. 서평 중에도 그녀의 시를 '성적인 무엇'으로 소개하는 글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에서 '성적 느낌'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시인은 시종 단아하고 어여쁜 언어, 물감이 묻어 있는 듯한 문자를 사용했다.

"에로스가 부각된 시가 아닌데 평론가들이 그렇게 보았고, 그런 서평도 있었다. 그래서 독자들도 종종 그런 시각으로 본다."

시인은 그런 의도로 쓰지 않았지만 굳이 오역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독자는 자신의 위치에 따라 자유롭게 이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단아하고 어여쁜 언어'에 대해서 "의도한 것이 아니며 평소 말투를 썼을 뿐이다"고 답했다. 평소 생활과 말투가 그처럼 우아하고 단아하다는 말이냐는 물음에 웃기만 했다.

백미혜는 3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며 화가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에는 '문학적 향기'가 흐르고, 시에는 색채가 반짝이다. 화가 김병종(서울대 미대 교수)은 그녀의 시를 두고 '분명 문자를 조립해 쓰고 있건만 팔레트에 색깔을 개어 그린 그림처럼 언어들이 문체를 발하며 살아 움직인다'고 했다.

백미혜의 시와 그림은 서로 돕는다. 시적 영감이 그림을 이끌고, 색의 빛깔이 시적 영감을 끄집어낸다. 시인은 1980년대 고층 아파트가 한창 사회적 문제가 됐을 때 아파트 주민의 삶을 시로 쓴 적 있다. 이 '고층 아파트' 시리즈는 이후 '미궁의 시간'이란 제목의 표현주의 그림으로 탄생했다. 시를 먼저 썼고 그림을 나중에 그렸기에 이 그림은 문학적이다. 10년 동안의 그림 작업 '꽃피는 시간' 뒤에 쓴 시들에는 분홍과 보라, 군청 등 색채가 묻어 있다. 세번째 시집 '별의 집'은 그림시집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인이고 화가이기에 그녀의 그림엔 이른바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미술인들로부터 '그림에 웬 이야기가 그렇게 많으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현대미술 사조는 그림에서 스토리는 물론이고 형태까지 배제하는 경향이 강한데, 거기에 '이야기'를 잔뜩 집어넣고 문학적 향기 풀풀 풍기니 그랬을 것이다.

"그런 비판을 피하려고 애썼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다. 나라는 사람이 있고, 내 자리가 있는데 내 그림을 그리면 그뿐인데, 그 시절엔 세간의 검열에 신경 썼던 것 같다." 시인은 지난해 대장암 수술을 받았고 여러 가지 아린 일을 겪었다. 그런 때문인지 '나 자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것이 가장 절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백미혜는 "그림을 그리고 나면 대체로 스트레스가 풀리는데, 시 한편을 쓰는 일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준다"고 덧붙였다. 시를 놓으면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도 없다. 어린 시절 그림대회, 글짓기 대회에 무던히 참가했는데 그림으로 받은 상보다 글을 써서 받은 상이 더 많았다고 했다. 그녀는 '내 삶에 시는 권리이고 그림은 의무다'라고 했다. '권리'를 '로망'으로 '의무'를 '일'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백미혜 시인은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다.

시인들은 흔히 '시를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백미혜는 '오히려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처음엔 자신이 시를 끌고 갔는데 어떤 순간부터 시가 자신을 끌고 다니더라는 것이다. 좋은 현상이 아니냐고 했더니, "나는 방점처럼 점을 찍었는데 그것이 좌표가 돼 내 삶을 규정하곤 했다"며 시가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을 설명했다. 준비 없이 독일로 유학을 떠났던 것도 '시'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 "일기라면 언제든지 서랍에서 꺼내 불태울 수 있지만, 발표한 시는 태워지지 않는다. 내 인생의 어떤 날들, 내게 왔다가 떠난 생각을 찢지 않고 보관하고 싶었다.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간에 그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흔히 '성적인 시'로 회자되는 '에로스의 반지'에 대해 시인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돼 있던 반지의 제목이다. 오래되고 구부러진 반지였다. 반지를 끼워주며 사랑을 나누던 사람들은 갔지만 반지는 남아 그 옛날의 사랑을 증언하고 있었다. 시집 '에로스의 반지'는 동서고금을 구분하지 않고, 시간의 파괴력 속에서도 부서지지 않는 사랑의 원형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의 속성은 성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남, 사랑, 구속, 배반, 이별, 그리움, 후회 등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시집 '에로스의 반지'는 사랑이라는 말에 구속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일별이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세번째 시집 '별의 집'은 '예술을 왜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제목 '별의 집'은 이집트 피라미드를 지칭한다. 피라미드는 그 안에 불멸에 대한 갈망, 부활, 영혼의 안식을 담고 있다.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어쩌면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만드는 행위와 같은 게 아닐까. 모든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불멸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별의 집'은 불멸을 갈망했던 파라오의 피라미드이며 불멸을 꿈꾸는 작가의 집이기도 합니다."

백미혜의 시는 어렵다. 서너번을 읽어도 알 수 없는 시들도 많았다. 그녀는 "너무나 주관적인 생각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그녀의 시에 문자보다 추상적인 '그림'이 어른거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어요 제 질투에/ 대해/ 그런데, 저에 대한 당신/ 질투도 있는지, 있다면/ 제발 당신 것도 엿보고 싶어요 그러나/ 당신은 제 홀깃한 마음 건너/ 물과 먹의 고요한 번짐만/ 바라보십니다/ 아아, 당신 날 찾아오실 리/ 없으시니/ 나 참답고 아름다울 때/ 제 생명인 이 질투/ 마지막까지 좇아가겠습니다 -번짐-

'번짐'은 물감과 글자가 섞인 시인데 그녀의 시 중에서는 알기 쉬운 편에 속한다. 시인이 화가가 아니었다면 '번짐'이라는 제목도, 번짐에 필요한 점도와 여백과 스며들기를 이처럼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의 다른 시작품들은 더 진한 회화적 분위기를 풍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백미혜는?=1953년 대구 출생.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 미술대학 회화 전공. 1982년 '심상'지 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토마토를 심은 후부터' '에로스의 반지' '별의 집'이 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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