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TV 영화를 보자] 가발

머리카락은 늘 섬뜩하다.

시신에서도 부패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머리카락이다. 시간을 견뎌내며, 육신이 썩을 때까지 기다리며 지키는 것이다. 일본 작가 스즈키 코지의 '검은 물밑에서'는 수도꼭지를 통해 연약한 머리카락이 쏟아질 때, 슬픈 죽음의 전조를 공포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처녀 귀신이 서서히 얼굴을 돌려 쳐다볼 때 경악하는 것도 얼굴을 가린 긴 머리카락 때문일 것이다.

아픈 상처를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가발은 누군가의 기억을 먹고 만들어졌다. 아름다워지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여인의 욕망이 죽음의 공포와 만난다면?

여름의 끝에서 한국 공포영화 한 편이 안방에 찾아온다. KBS1TV 명화극장에서 25일 0시 55분 방영되는 원신연 감독, 채민서 유선 주연의 '가발'이다.

'가발'은 누군가의 기억이 담긴 가발이 탐스러운 머리를 원하는 동생의 손에 들어온 후로 두 자매에게 일어나는 서늘하고 오싹한 사건을 그린 공포영화이다.

어두운 병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수현 앞에 퇴원 선물이 놓여있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 동생을 위해 언니 '지현'이 준비한 가발이다.

웬일인지 윤기 흐르는 가발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수현은 메마른 머리위로 가발을 천천히 눌러쓴다. 그 순간 거울 속 수현은 점점 생기 넘치는 매혹적인 여자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이상한 기운이 그녀를 뒤덮는다.

가발을 쓰면서 하루가 다르게 병이 호전되는 수현을 보는 지현은 불안하기만 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동생이 자신의 옛 애인인 기석을 바라보는 눈도 예전과는 다르다. 게다가 가발을 빌려간 친구 경주는 참혹하게 죽은 시체로 돌아오고 수현은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는다.

가발로 인해 변해가는 사랑스런 동생이 공포가 되어버린 언니, 그리고 점점 두 자매에게 비밀을 간직한 가발의 저주가 파고든다.

"머리카락은 기억을 먹고 자라."

자살한 여고생이 있다. 피어나지도 못한 인생이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죽음으로 이끌었을까. 그녀의 기억과 욕망이 올올이 박혀 만든 가발은 애처롭게 죽은 그녀의 기억을 모두 담고 있다.

한 인간의 애절한 사랑은 집착이 되고 그 집착은 원망과 질투, 복수를 낳아 두 자매를 뼈까지 저려오는 공포로 몰아넣는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다 죽은 자의 기억이 담겨 마침내 산 자의 영혼까지 잠식해 들어간다는 섬뜩한 발상에서 출발한 영화다.

문득 샤워를 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긴 머리를 볼 때 느꼈던 오싹한 느낌, 욕실 배수구에 가득 쌓여있는 머리카락 뭉치를 보면서 느꼈던 섬뜩한 기분 등 검은 머리카락이 주는 공포 이미지들이 영화 속에 박혀 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