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 자식과 가면 배가 고프다

제주도에 아내와 함께 다녀오다 면세점에 들렀다. 아내가 줄곧 명품 지갑 매장으로 향했다. 지갑을 한참 보다 다시 내려놓았다. "마음에 들면 사지 그래"라고 했지만 아내는 주저했다. 금액이 무려 40여만 원이 넘었기 때문이다.

살림살이에 알뜰하다는 평을 듣는 전업주부들의 경우 입고 다니는 상·하의 옷값은 대부분 5만원도 안 된다고 한다. 알뜰 주부들이 백화점에 가면 여성복이 진열된 층에 가더라도 둘러보고 망설이기만 할 뿐 거의 구매로 이어지지 않는다.

백화점에 가는 알뜰 엄마들이 옷을 사는 곳은 남편이나 아이들 옷을 파는 매장이다. 자신에 대한 투자에는 인색한 주부들도 아이나 남편에 대한 투자에는 인색하지 않다. 그래서 자녀들의 옷값은 대부분 50만원을 넘긴다.

일부 중고생들은 명품 브랜드 옷을 입기 위해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 이전에 아르바이트는 주로 고학년 학생들이 했지만 요즘에는 저학년 학생들도 소비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한다. 남학생들은 용돈이나 심지어 아르바이트를 해서 '여친'에게 고가의 명품을 사주기도 한다. 일부 여학생은 '남친'과 헤어지려다가도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이별을 연장하기도 한다는데, 바로 명품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다.

따지고 보면 10대들의 이러한 '명품 중독' 현상은 바로 기성세대, 그 중에서 어머니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알뜰 엄마들이 자신의 아이만큼은 기죽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명품만 입힌 결과가 아닐까. 그런데 이게 부모의 무덤이자 아이에게도 무덤이 될 수 있다.

아이에게 명품만 입히다 보면 버릇없는 아이, 철없는 아이, 자신만을 아는 아이로 자랄 수도 있다. 사람은 '풍요'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더 훌륭하게 성장한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다가오는 9월이면 또 많은 조기유학생들이 한국을 떠나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인도,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낯선 유학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일부 엄마들은 자녀와 함께 현지로 가서 뒷바라지를 하고 그렇지 못한 엄마들은 한국에서 아이의 학비를 벌기 위해 생업전선에 나서기도 할 것이다. 아이들은 점점 더 고급 옷을 입고 더 교육환경이 좋은 곳에서 공부를 하고 엄마들은 몇만원짜리 옷을 입고 더 열악한 생활전선에 서 있게 되지 않을까.

"자식을 앞세우고 가면 배가 고파도/ 돈을 지니고 가면 배가 안고프다"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 나오는 '어머니의 사는 법'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자녀에게 명품 옷을 입히고 명문학교에 보내기 위해 평생 자식만을 앞세우다 보면 노년에 정작 자신을 위해 쓸 돈은 바닥날 게다. 그때 그 아이들은 또 자신의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부모를 돌볼 여유가 없을 것이다. 명품에 중독된 아이는 커서도 명품을 입기 위해 지갑을 열겠지만 늙은 부모를 위해서는 지갑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녀는 또 결혼할 때에도 아파트와 승용차를 사 달라고 조를 게다. 주변에 한 부모는 아들 결혼 때 아파트와 승용차를 사주었는데 지금 우울증을 앓고 있다. 그 아들은 아파트를 사주지 않고 전세금을 주겠다고 하자 계속 결혼을 미뤘다. 보다 못해 아파트를 사주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승용차를 요구했다. 결국 부모가 두손을 들고 결혼을 했는데, 2년이 지나도 부모님을 찾아뵙지도 않는다고 한다. 불효막심한 아들과 며느리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 부모가 제대로 자녀교육을 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자녀의 기를 키워주겠다는 부모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 있다. '아이들을 살갑게 키우기보다 엄하게 길러야 끝내 吉(길)하다.' 바로 '주역'의 말이다. 비록 살갑게 키우더라도 '살가움 49, 엄함 51'의 비율로 배분해야 한다. 때로는 2%포인트가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하는 매치포인트(match point)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앞세우고도 배가 고프지 않는' 자녀교육의 해법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최효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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