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靑松 가는길

"여러분은 지금 대한민국 육지 안에서 가장 산골로 가고 있습니다. 靑松(청송)으로 가는 길은 거의 獨島(독도)로 가는 길에 비유할 수도 있지요. 그만큼 한 번 찾아가기가 힘든 곳입니다…."

수년 전 '작가 김주영과 함께 떠나는 문학기차여행-청송 가는 길'에서 청송 출신 작가인 김주영이 서울에서 출발한 기차 안에서 여행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청송 가는 길'에 나선 사람들은 그야말로 기차를 타고 먼 길을 와서는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에 졸다가 깨다가를 거듭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청송에 도착했다.

김주영의 대표작 '客主(객주)'의 배경인 청송,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무대 주산지가 있는 청송 가는 길은 그렇게 멀고도 험했다.

그러고 보니 대구에서 청송으로 가는 길도 결코 만만찮다. 대구에서 청송읍까지 가는 데 5, 6시간씩이나 걸렸던 20여년 전 비포장길 시절과 비교를 한다면 桑田碧海(상전벽해)나 다름없는 변화가 있었지만, 청송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데다 험준한 재를 두 개씩이나 넘어야 하기 때문에 '청송 가는 길'은 아직도 심리적'육체적 부담이 적잖은 것이다. 이처럼 '대구~청송' 간 접근성이 특히 멀어 보이는 것은 그 길에 노귀재와 삼자현재가 만리장성처럼 가로막고 섰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파죽지세로 북진을 하던 왜군도 되돌아갔다는 데서 유래한 노귀재. '왜군이 돌아간 재'를 '奴歸(노귀)재'라 부른 것은 왜군에 대한 적대감과 함께 험준한 산세를 함께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로가 포장되기 전인 근년에만 해도 대구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청송으로 첫 부임해 가던 여교사들이 험한 재를 넘으면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토록 첩첩산중에 어떻게 머무를 것이며, 과연 돌아올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했다는 것이다.

노귀재에는 열악한 교통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20여년 전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 '맨발의 행군'을 결행한 유명한 일화도 남아있다. 청송읍에서 안덕~현서를 거쳐 영천~대구로 이어지는 유일한 교통로의 포장공사를 이끌어내기 위해 국회의원이 맨발의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그 노귀재에는 지금 터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교통오지인 청송의 막힌 숨통을 뚫어주기 위한 이 공사는 6년째 30%를 조금 웃도는 공정률을 보이며 문자 그대로 '하세월'이다. 경북도가 2010년까지는 공사를 마무리한다는 의지를 보이며 나머지 사업비 338억원을 정부에 다시 요청했지만 반영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노귀재를 넘어 한참 가다가 청송읍을 60리쯤 앞두고 또 하나 솟아있는 산등성이가 바로 삼자현 고개이다. 이름 그대로 적어도 세 사람은 만나 동행을 해야 넘을 수 있었다는 험한 고갯길이다.

청송은 이렇게 기찻길과 고속도로조차 지나지 않는 전국의 몇 안 되는 郡(군)지역 중의 하나이다. 아직도 '골짜기' 또는 '오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청송의 도로는 비록 비포장은 면했지만 그 대부분이 일제강점기 때의 신작로 그대로이다.

청송이 '육지 속의 섬' 신세를 벗어나려면 먼저 노귀재 터널공사의 조속한 마무리와 함께 영천~청송간 4차로 확포장 공사가 시급하다는 게 주민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이다. 청송사람들과 출향인들은 청정지역 청송이 개발로 오염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다만 '교통오지'란 오랜 오명을 떨치고 청송의 아름다운 자연과 순후한 인심을 두루 나누고 싶을 따름이다.

수백년 묵은 왕버들이 손짓하는 주산지의 새벽 안개와 수달래가 처연하게 피어나는 주왕산의 기암괴석과 폭포, 속병을 치유한다는 달기'신촌 약수물과 닭백숙, 선비의 자취가 어린 방호정과 白石灘(백석탄)을 경유해 길안천으로 이어지는 해맑은 신성계곡…. 오늘도 늦여름 햇살에 꿀사과가 무르익어가는 산자수명한 청송의 산하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조향래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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