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두진의 책속 인물 읽기]만년/자살하려는 사람들

"아버진 뭐 하러 살아요?"

아버지는 스와의 진지한 얼굴을 힐끔힐끔 보고나서 중얼거렸다.

"나도 몰라."

스와는 손에 들고 있던 참억새 잎을 씹으면서 말했다.

"뒈지는 게 나은데."

아버지는 손을 올렸다. 패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머뭇거리다가 그냥 손을 내렸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어복기' 중에서-

"죽는 게 가장 좋은 거야. 나만이 아니야. 적어도 사회의 진보에 마이너스가 되는 놈들은 전부 죽는 게 좋아. 그게 아니면, 너, 마이너스가 되는 자라도 어쨌든 사람은 모두 죽어서는 안 된다는 뭔가 과학적인 이유라도 있는 거야?"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잎' 중에서-

자살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집 '만년'에 묶인 단편들은 '자살' '죽음' '허무'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등장인물과 배경이 다르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그렇다. 심지어 원숭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원숭이 섬'도 세상살이의 허무에 관한 이야기다. 단편소설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에 등장하는 세입자 세이센은 늘 새로운 일을 꾸미고,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대지만 주인인 내 입장에서 그가 하는 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무일푼인 그는 방세가 일년 넘게 밀려 있다. 그는 방값 독촉을 받기만 하면 새로운 일을 시작했으며 '방값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확신에 차 지껄인다. 그러나 내일이면 '어제 일은 실패했고,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고 씩씩하게 말한다. 여기서 밀린 '방값'을 '인생의 의미'로 이해해도 틀리지 않다.

주인공인 나는 세이센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그가 천재이기에 다소 특별하게 보일 뿐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의 무의미한 실체를 확인할 뿐이다. 나는 결국 '쓸모없는 세이센과 나 자신이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평범한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인 셈이다.

자살을 생각하는 책 속 모든 인물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다자이 오사무다. 다자이는 젊어서 죽었기에 영원히 '청춘작가'로 남았다. 그는 오직 '만년' 한권을 쓰기 위해 10년을 투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자이는 스스로 1년을 살아도 남들 3년처럼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젊은 다자이는 자신의 삶이 '만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고 그런 제목을 붙였다. 정작 소설집 '만년' 안에는 '만년'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없는데, 이는 이 소설집에 포함된 소설 모두가 '만년'이라는 말이다.

다자이는 평생 네 번 자살을 시도했다. 두 번째 자살 시도 때는 카페 여급과 함께 투신했는데 여급만 죽고 혼자 살아남았다. 이때의 상처는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짐이 됐다고 한다. 그는 1948년 6월 13일 네 번째 투신해 자살에 성공했는데,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이 마지막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평범한 우리는 죽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적어도 죽음을 먼 훗날로 미루려고 애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헤맸던 것도, 도교 신선들이 불사약을 만들어 먹었던 것도, 줄기세포 연구를 통해 난치병을 극복하려는 과학자들의 노력도 모두 죽음에 맞서려는 시도다. 평범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움, 소멸, 슬픔, 이별, 고통 등 부정적인 이미지와 연결짓고 가능하면 거기서 멀어지려 애쓴다.

다자이 오사무는 어째서 그토록 자살을 원했을까? 그가 '평범한 자살자'들처럼 명예를 지키려거나, 참기 힘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 같지는 않다.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육체의 죽음 이후에 무한히 확장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은 것 같지도 않다. 터무니없는 종교에 빠진 것도 아니다. 천재화가 고흐는 자살하기 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유서를 남겼다. 말하자면 고흐의 자살은 현실의 고통에 대한 회피였다.

소설 '만년'을 '유언'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다자이의 자살은 '생의지 부재'에서 기인한다. 그의 소설은 시종일관 삶을 무의미하고 귀찮은 무엇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다자이는 평생 '사춘기'를 겪었다는 느낌도 든다.

다자이 오사무가 그랬듯 우리는 죽는 날까지(비록 평균수명보다 훨씬 더 산다고 하더라도) '성장통'을 겪으며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어떤 시절이고 평화롭고 호화롭기만 한 세월은 없다. 걱정거리라고는 없고, 희망과 행복으로만 충만하던 시절이 내 인생에 단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인생에 질풍노도의 시기는 '청소년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춘기 열병'을 앓는지도 모른다. 긴 세월과 변하지 않는 많은 것들에 비교할 때 찰나의 사람살이를 '사춘기'라고 한들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자이는 스스로 '만년의 노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사춘기'였는지도 모른다.

다자이 오사무가 네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는 점은 곱씹어 볼 만하다. 진정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 세 번씩이나 자살에 실패할 수 있을까? 다자이는 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는 여러 차례 '살고 싶다!'고 외쳤는데 아무도 듣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세 번이나 자살에 실패했을 리 없다. 그러니 특정한 범인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타살 의혹이 제기됐던 네 번째 자살은 진실에 가깝다.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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